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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값진 유물은 금붙이가 아니라 고추장 항아리"
"가장 값진 유물은 금붙이가 아니라 고추장 항아리"
  • 김용운 대표기자
  • 승인 2015.02.02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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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강테마박물관 '왕언니' 박형숙 학예실장이 꿈꾸는 미래

2014년 연말 해금강테마박물관의 박형숙 학예실장은 ‘2014년 제3회 대한민국 교육기부대상(大賞)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남도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박물관, 그것도 사립박물관에서 일하는 한 학예사가 그리 큰 상을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거제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는 도장포와 신선대를 바라보고 서있는 하얀 색의 박물관에서 그를 만났다. 마침 강원도 화천에서 온 두 부부작가의 조각전과 그림전이 막 시작된 터라 여전히 바빴다. 박물관 카페에서 상을 받게 된 이야기며 거제에 살게 된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14년 12월, 황우여 교육부장관으로부터 교육기부대상을 받고 있는 박형숙 실장.
빨간 등대, 푸른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하얀 박물관이 그가 일하는 곳이다.

“박물관은 살아있다”

“학습·예술·체육 등의 분야에서 방과 후 및 주말 프로그램, 방학 중 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건전한 교육발전을 목적으로 양질의 교육을 실천하고 기부했다.”

교육부에서 밝힌 수상 사유다. 한마디로 사립박물관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고 학교나 단체를 찾아 다니거나 학생들을 불러 모아 문화와 예술, 역사에 관한 지식을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재능기부의 전형인 셈이다.

그간 활동내역을 좀 알려달라는 부탁에 그는 “말로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우니 이걸 보라”며 ‘공적조서’를 건네주었다. 전시 41회, 교육 110여회, 문화공연 11회, 도록제작 9권 등의 활동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할 일 없이 노는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직원들이 그런 일에 나서는 걸 관장은 동의했을까?

“박물관이 유물만 전시하고 관람객이 찾아오기만 기다리는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관장님도 물론 그런 생각이구요. 끊임없이 지역과 소통하고 나눌 것은 나누는 움직이는 공간이죠. 밖으로 나가거나 가진 재능을 지역에 기부하는 것도 박물관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죠.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식구’로 뭉친 아홉 명의 학예사들

없는 시간을 짬 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영역이 박물관의 주요 사업 분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특별히 보너스를 받는 것도 아닌데, 직원들의 불만이 있을 법도 하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우리 박물관에는 9명의 학예사가 있어요. 근데 이 멀리까지 이들이 와서 근무를 시작할 때는 박물관 안에서 유물만 만지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하고 옵니다.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봐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들 일종의 마음 가짐인데 다들 그렇게 적극적으로 일해 줘서 참 고맙기도 하구요.”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46살이다. 학예사들 중에서는 가장 고참에 속한다. 외딴 곳에 있는 박물관의 특성상, 그리고 넉넉지 않은 급여로 따로 살림을 차려나가기 어려워 이들은 모두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공동으로 생활한다. 박물관 일 이외에 후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부담도 커 보였다. ‘왕언니’로서의 책임감도 크지 않을까?

“사실 제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세끼 같이 밥 먹고 같이 생활하다 보니 9형제의 맏이 같은 생각도 들어요.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서로 배려하고 지내줘서 특별히 무슨 규율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다들 참 착해요.”

食口, 말 그대로 식구다. 9형제란 말이 실감났다. 그 형제들의 면면은 어떨까? 자신의 리더십 대신 후배들의 자발성을 자랑했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 고고미술학을 전공한 사람도 있고 저처럼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도 있어요. 고향도 서울, 대구 등 다양하죠. 근데 이 곳에서는 모두 하나가 됩니다. 밥도 밥이지만 뭐랄까 뜻이 맞아야 한 식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재밌다. 바빠서 힘들 틈이 없다”

그는 순천 태생이다.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그 고장 이름처럼 하늘을 따르는 사람들이니 어질고 착하다.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동미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2011년 6월에 거제로 왔으니 3년 6개월 정도 되었다. 40대 초반에 낯선 곳 거제, 그것도 남부 끝자락 조그만 박물관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40대쯤 되면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을 하잖아요? 저도 그랬죠. 앞으로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는 일, 굶어죽지 않을 정도 벌면서 좋아서 하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 박물관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해금강테마박물관에서 사람을 구하기도 했구요. 운이 좋았죠.”

그의 직책은 학예실장이다. 하지만 지방의 사립박물관에서 마음 편히(?) ‘학예’쪽 일만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업무 영역이 궁금했다.

“우리 박물관은 학예팀, 기획전시팀, 관리팀 이렇게 세팀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일의 경계가 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분명하진 않아요. 유물 수집, 보관, 관리, 전시 이 모든 것이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거라 모든 분야를 다 알고 있어야 하기도 하구요. 그러다보니 다 챙겨야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3년이 넘었으면 지칠 법도 한데, 그는 일이 재밌다고 했다. 바빠도 일의 재미를 느끼려면 결국 그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바쁘면 힘들어 할 틈도 없다고 말이죠. 제가 좀 그런 편입니다. 3년 6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새로운 일이 생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죠. 저는 그런게 참 재밌습니다. 갤러리 전시는 특히 바쁜 일입니다. 올해 갤러리를 하나 더 추가해서 2개로 늘렸으니 좀 더 바빠질 거라 봐요. 올해부터 1개월에 2회씩 전시할 예정이거든요. 성수기 때는 관람객이 하루에 2천명 넘을 때도 있어요. 그때는 학예사 모두가 주차요원이 됩니다. 자기 업무 볼 시간도 없어도. 밤에 따로 하는 경우가 많죠. 그럴 땐 정말 ‘아 힘들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힘든 몸과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 하는데 외딴 곳이라 그 마저도 쉽지 않을 듯 했다. 경치 좋은 것만으로 심신을 달래기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쉬는 날에 휴가 모아서 집에 다녀오는 게 가장 잘 쉬는 방법이구요. 간혹 고현으로 함께 회식하러 나가는 경우도 많아요. 한 달에 한번쯤 직원들 생일이 생기니까요. 영화도 같이 보기도 하구요. 맥주도 한 잔 하고. 관장님도 같이 먹고 어울리는 것 좋아해서 자주 사 주시는 편이죠. 그러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그래요.”

"가장 값진 유물은 금붙이가 아닌 고추장 항아리"

박물관 근무 3년 6개월 동안, 그 많은 전시, 교육 등 행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2013년에 ‘흥남에서 거제까지’라는 흥남철수작전 관련 기획전시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참 많은 걸 배웠어요. 거제가 가진 역사성 중에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 이런 것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우리 박물관에서 이와 관련된 기획 전시를 한다는 게 참 좋았어요. 그 당시 유물을 수집(전시기간 중 임시로 빌려옴)하러 다니면서 실제 당시 피난 온 분들을 만났는데, 어떤 분은 고추장 항아리를 건네줬어요. 3일 동안 배안에서 고추장만 먹었다면서. 그때 생각했죠. 가장 값진 유물이란 금붙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이 녹아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면서 대뜸 <국제시장>을 보았느냐고 되물었다. 몇 번 마음 먹었는데 아직 보지 못했다고 했다.

“꼭 한번 보세요. 부모님세대 삶이 아마 대부분 그랬을 거라고 봐요. 근데 한 가지 아쉬운 건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흥남철수작전에 우리 거제가 안 나오는 거예요. 사실 그 10만 명에 가까운 피난민들이 기적처럼 배에 올라타서 거제로 왔는데 그 장면이 없어서 많이 아쉬웠죠.”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결정한 국군과 미군은 흥남부두에 집결했다. 이때 모인 10만여 명의 피난민들은 미군 수송선에 올라탄다. 대표적인 것이 정원 60명인 ‘메리더스 빅토리’호 이야기다. 무기와 군수품을 버리는 대신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을 싣고 흥남을 떠나 28시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한다. 하지만 부산은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된다. 하루를 더 달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이 배는 장승포에 도착해 피난민을 내려놓는다.

전시회가 한 해 정도만 늦추어 졌거나 영화가 좀 빨리 나왔으면 참 좋은 타이밍 이었을 텐데, 너무 앞서 나간 탓이었다고 말하자 그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게요.”

박물관 관장과 ‘꿈꾸는 인문학교’

아무리 현재의 일이 재미있고 보람있다고 해도 개인의 전망과 연관되지 않으면 그 일은 지속하기가 어렵다. 급여가 넉넉할 리 없으니 돈보고 할 일도 아니고 평생을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파묻혀 살 요량으로 온 은둔객도 아닐 것이다.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봉급보고 시작한 일은 아닙니다. 학예사 보수가 열악한 건 사실이에요. 사립박물관은 특히 그렇죠. 공동체 구성원으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해요.”

머뭇거리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제 꿈은 개인 박물관 하나 차리는 거예요. 거제도 좋고 다른 어디도 좋고. 아마 우리 학예사들 대부분이 그런 꿈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자기의 생각과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박물관의 관장이 되는 것,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미래는 없겠죠.”

인터뷰를 마무리 하려 하자, 그는 이야기가 남았다고 했다. 개인적인 꿈은 그러하나 아직 오랫동안은 학예실장으로 있을 해금강박물관의 미래가 더 중요한 듯 했다.

“우리 박물관이 유물전시만 하는 곳은 아니라는 것은 그간의 노력으로 조금은 알려졌어요. 지역에 문화컨텐츠를 제공하고, 특히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도록 더 힘을 써야 하는데 시설이 열악해요. 특히 동부, 남부, 거제, 일운 등 남부권 학생들, 문화적 사각지대에 있는 이 학생들이 와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요. 가르칠 수 있는 인적인 네트워크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경험도 뒤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 우리 박물관의 학습공간이 너무 좁아서 시에서 지원을 좀 해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꿈꾸는 인문학교’다. 부지는 박물관 한편의 공터를 내놓을 테니, 아담한 건물 한 채만 지어주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시에다 공식적으로 사업제안서를 넣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시의원들이 방문한 자리에서 자료를 만들어 요청을 했다고 했다.

“뭐라 그러시던가요?”
“한번 검토해 보시겠다고 그랬습니다.”

신선대 앞 푸른 바다가 햇살에 빛났다. 그의 꿈도 좀 더 빨리 눈앞에 다가오기를, 박물관의 미래도 좀 더 밝아지기를 염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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