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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소녀일 때가 있었지
엄마도 소녀일 때가 있었지
  • 장남수
  • 승인 2015.03.02 0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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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수(칼럼위원)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부설 노동자역사작업장 연구원
<빼앗긴 일터>저자



세 명의 딸과 세 명의 엄마들이 둘러앉았다.

딸들은 엄마에 대해, 엄마들은 지금 딸 나이였던 때를 회고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노동운동을 했던 엄마들의 젊은 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또 엄마는 딸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으며 딸은 엄마의 삶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 등을 나누어보는 <딸들이 말하는 엄마이야기>에 필자와 필자의 딸도 함께 했다.

딸들은 “나는 예쁜 옷 입고 공부하러 다닐 나이에 엄마는 노동운동을 하셨구나, 라는 생각에……”라며 울먹이기도 했고, “지금 내 나이 때 엄마는 공장에서 일하고 노동운동 하느라 징역도 살았고…… 그런 것 생각하면 가끔씩 놀란다, 용돈 투정이나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고도 했다.

또 어느 딸은 “내가 중학생 때인가 미역국을 먹는데 엄마가 ‘감옥에서는 여기에 간장이랑 참기름 넣어서 먹었어’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깜짝 놀랐다”고도 했다. 덕분에 이 딸은 '남들에게는 역사이지만 나한테는 남 일이 아닌' 우리 근현대사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명의 딸이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나는 엄마가 중학교는 졸업한 줄 알았어. 그런데 그거 하나도 안 부끄러운데 왜 숨겼어, 그게 너무 마음아파.” 그렇게 엄마들의 삶을 이해하며 딸들은 참 많이 철들어 있었다.

이것은 몇 년 전 이야기다. 그때 둘러앉아 나눈 이야기들은 2010년 발간한 <원풍모방노동운동사>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일상사는 1980년 이래 독일을 중심으로 구미학계에 정착한 역사연구와 서술의 새로운 흐름이 되어(안병직, 2002)’ 있다는, 관련 논문이나 책들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별 것 아닌 내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며 일상사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필자는 평범한 사람들, 특히 가장 가까운 부모님의 일상을 기억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작업들을 많은 사람들이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2년여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장 애석한 일이 어머니의 삶을 녹취로 남기지 못한 것이다. 돌아가시기 두어 해 전에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두어 시간 가량 어머니 삶을 녹취 한 적이 있었지만 그마저 파일을 잃어버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다. 그나마 80여년 살다 가신 어머니 이야기는 간혹 이런저런 때에 들어볼 기회라도 있었지만 훨씬 이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과 생각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 또한 새록새록 아쉽다.

필자의 아버지는 가난한 종가에서도 종손의 위엄이나 권위 같은 것이 배어있었는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어려운 분이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갓 성년을 넘긴 딸이 노동운동 한다고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있을 때 두루마기를 입고 면회를 오셨다가 푸른 옷에 붙은 수감번호표에 시선이 머무는 순간 눈물을 죽 흘리시는 게 아닌가.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그리도 근엄했던 저분이 그래도 내 아버지가 맞구나, 라고 확인(?)하는 진한 순간이었다. 그날 끝까지 웃으며 보내 드렸지만 방으로 돌아가 이불더미에 코를 묻고 통곡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고향인 경남 밀양의 작은 마을에는 친척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한국전쟁과 이념갈등 등 민족사적 비극은 이 마을도 예외 없었다. 같은 마을의 친척 중 아버지의 당숙 중 한 분은 경찰서장이었고 다른 한 분은 빨치산이었으며 그 분의 여동생이 심부름을 다닌 죄로 고초를 겪기도 했고 어느 날은 일제히 검거되어 밀양 공설운동장으로 끌려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먼 훗날 어머니와 인터뷰하면서 들은 적이 있지만 아버지께 직접 필자가 태어나기 이전의 고향이야기와 친척들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필자가 어릴 때는 산업전사 1세대가 되어 서울에 계셨던 아버지는 딸들이 공장 노동자가 된 후에 다시 귀향하셨고 50대중반에 생을 마감하셨기에 아버지의 삶과 생각을 들을 기회는 영원히 없어져버린 것이다.

얼마 전, 한 지하철 역장으로부터 작고하신 30년 전 부친의 구술 녹취록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글파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녹취를 할 당시의 부친은 약간의 치매경향을 보이는 상태라 목소리도 어눌하고 알아듣기 어려웠고 당시 이십대였던 역장의 질문은 또렷해서 그를 통해 내용을 유추해가며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기엔 가족사, 문화사, 생활사가 모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눌한 음성의 녹음테잎은 가족들에게는 선친의 음성이 담긴 귀한 보물일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의 음성이 참으로 그립다. 그 이유 만으로라도 ‘부모님 살아계실 때 효도’도 해야겠지만 영상이든 녹취든 무엇으로라도 기록을 남겼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 풀어놓으면 책 몇 권은 된다”는 말을 곧잘 하는 어르신들에게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놓게 하고 들어드리는 것만으로도 속에 쌓인 응어리가 좀 풀리고 부모 자식 간 이해도 커진다. 더불어 그 기록물은 가족의 소중한 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도 소녀일 때가,
엄마도 나만할 때가,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
(이설아, ‘엄마로 산다는 것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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