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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1편)
일본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1편)
  • 고영화 시민기자
  • 승인 2015.03.1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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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 특별기고] 조선통신사 이야기

<거제뉴스광장>에 '고전문학'을 연재하는 고영화 선생이 조선통신사와 관련한 그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글을 보내왔다. '고영화의 조선통신사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고영화의 조선통신사 이야기>
1) 머리말
2) 여말선초(麗末鮮初) 일본 사절단과 거제도 상황
3) 여말선초 조선통신사(회례사) 파견
4) 여말선초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 개괄
5) 거제도 지세포 통신사절단 출발지(出發地)
6) 계해조약(癸亥條約)
7) 조선초기 일본사절단 예물(禮物) 품목 (이상 1회)

8) 거제도를 경유한 통신사들의 시편(詩篇)
9) 조선전기 지세포를 거쳐 간 사절단 인물 소개.
10) 맺음말 (이상 2회)

 

일본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 머리말

일본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하는 해상출발지(海上出發地)로 부산포(釜山浦)를 모두 이용했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15세기에는 대부분 거제시 지세포(知世浦)항구에서 유숙(留宿)한 후, 대마도(쓰시마)로 출발한 거제도의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대양을 향해 나래를 펴는 거제시민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거제도는 고대 한국∙중국∙일본의 해상교통로의 요충지(要衝地)로써 다양한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넘쳐나는 곳이었다. 특히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일본과의 무역은 기원전부터 이어온, 거제도를 경유한 해상로(海上路)를 이용했는데, 전라남도 남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경남의 마산(합포), 웅천(진해), 김해, 부산포 등에서 출발해 거제도의 다대포∙지세포∙아주동(옥포) 등지에서 배를 정박한 후에 해상의 일기를 살핀 후, 쓰시마 난류(쿠로시오 지류)를 타고 대마도 해안에 이르는 바닷길이었다.

백제의 무역, 김해 가야국의 일본 항해길, 몽고의 일본정벌, 조선의 대마도 정벌 모두, 거제도 해상을 경유해서 대마도로 향하였다. 고려말기부터는 가끔씩 부산포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연중 동해로 흐르는 대한해협의 쓰시마 난류 때문에,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몽정벌군의 일본 침략과 여말선초(麗末鮮初) 3차례 대마도 정벌(東征)이 모두 거제도 해상을 이용했던 계기로 15세기 거제도는 최전방 해안의 수군진영이 섬을 빙 둘러 구축되고 거제 지세포항구는 수군진영과 더불어, 계해조약(癸亥條約)의 체결로 대마도 왜선들이 문인(文引)을 확인하고 어세(漁稅)를 납부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거제도는 통신사(사절단)의 대마도 항해 길의 출발지(出發地)나 기착지(寄着地)로 이용되었다.

특히 통신사로 가는 이들이 도중에, 거제도에서 남긴 시편(詩篇)이 많이 남아 전한다. 험난한 항해 길과 목숨을 담보로 하는 사신(使臣)의 입장에서, 그 분들은 고뇌와 우수에 가득 찬 심정이었음에도, 유독 거제도의 풍광만은 아름답고 풍류가 있는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남겼으니 15세기 당시 안정된 거제지역 상황과 거제현민의 풍요롭고 평온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일본 사절단이 지세포 항구를 주로 이용한 배경과 당시의 외교상황, 계해조약(癸亥條約), 그리고 거제도의 여말선초 상황은 물론, 15세기 지세포에서 대마도를 향해 어려운 발걸음을 옮긴 주요 사절단의 예물(禮物) 품목과 외교사절단의 인물, 거제해상에서 남긴 시편(詩篇) 등을 살펴 보고자한다.

2) 여말선초(麗末鮮初) 일본 사절단과 거제도 상황

대마도(對馬島)로 가던 일본사절단이, 대마도 항해 길의 출발지(出發地)나 기착지(寄着地)로써 거제시 지세포(知世浦) 항구를 이용한 시점은 고려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통신사가 대마도로 향해 출발하거나 경유지로 이용한 시기는 15세기였다.

특히 15세기 일본 본토는 지방 다이묘들이 세력권을 형성한 전국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의 외교 상대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와, 큐슈 북부지방과 혼슈 서부지방의 맹주 대내전(大內殿)과 소이전(小二殿)을 상대해 외교관계를 맺어왔고, 때론 교토의 막부쇼군의 취임과 사망 時에 방문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通信使)’,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했다.

'외교통신(外交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에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으나 이 사행(使行 사신행차)은 도중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고, 그 뒤 1429년(세종 11) 박서생(朴瑞生)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 일본 교토(京都)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였는데 이것이 실제로 시행된 최초의 통신사(日本通信使)라고 할 수 있다.

기록상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가는 일행을 ‘통신사‘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고려시대 1375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할 때였는데 그때는 명칭만 통신사였을 뿐, 그 조건과 목적을 갖추지 못했다.

조선초기 통신사 일행은 일본과 대마도 호위선단을 제외한, 상사(上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수행원, 격군을 포함 100 여명에 2~4척의 선단으로 꾸렸는데 조선후기에는 400 여명에 6척의 선단이나 되었다.

실제로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는 바닷길에 난파의 전례가 자주 발생하는 대마도까지, 예상할 수 없는 바람과 파도 때문이었다. 또한 호위를 맡고 있는 대마도주 왜인들과 막부장군들의 수하들이 사신을 응접함에 있어서 언제 돌변할지 몰라 매우 염려되었으며 특히 왜국의 음식과 풍토병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였다.

조선중기까지 대마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착한 우리나라 남해안 항구는 당시 쓰시마 난류와 바람의 방향 등이 주 요인으로 작용하여 남동해안 여러 지역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거제도, 웅천(제포), 가덕도, 다대포, 부산포, 울산 등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자주 전한다.

조선초기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前에, 거제도에는 도만호(都萬戶)가 옮겨와 있었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왜구의 길목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고성∙거제 인근 지역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8곳이나 되었다. 당시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에서 거제(巨濟) 옥포(玉浦)로 옮겨 도만호가 수어하였는데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 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 설치한 견내량(見乃梁) 수군만호도 거제(巨濟) 옥포(玉浦)로 옮겼는데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 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 때 거제 수군인원만 4000 명이 넘었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 대마도 정벌과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후 대마도 정벌 후에 가배량진영은 거제시 오아포(다대포)로 이설하면서 수군도안무처치사(오아포), 이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경상우수영)로 명칭이 바뀌었다. 1418년 세종∙태종 두 임금께서 대마도 정벌 前에 거창군 가조현에 있던 거제현관청을 거제본섬으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실제 세종 4년(1422)에 환도(還島)하였다.

그리고 1444년(세종26) 대마도 항해의 기착지 역할을 하던 지세포에, 1443년 계해조약(癸亥條約)으로 인하여 만호를 두었다가 세조3년 1457년 만호를 폐지하였는데 성종4년 1473년 다시 복치하여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세종13년 1431년 옥포에 수군진영을 설치, 문종1년 1451년 옥포만호로 승격하였고 조선중기에는 옥포에 왜학을 두게 되었다.

단종1년 1453년에는 조라포 수군만호(구조라)가 설치되면서 거제섬 전체가 거대한 해안방어의 요충지로 변모해 나갔다. 1449년 진무토평사(鎭武討評事) 이호성(李好誠 1397~1467)이 거제현령으로 부임해 읍치 고현(고정리)에 새로 성을 쌓았으며(1453년 완공), 1470년경에는 거제7목장과 거제7진영이 함께 갖춰져 거제도는 우리나라 최전방 군사기지로써 든든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사절단은 16세기 초 삼포왜란 以後부터는 동래현 부산포를 이용해 일본으로 향했는데 이는 선박의 기능과 축척된 항해술의 발전이 한몫을 했으며 또한 육지에서 일본으로 가는 가장 빠른 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만에 ‘배숲개’(주림포 舟林浦, 현재 옥림리)라는 지명이 있다. 옛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아주 옛날에 지세포만에 배들이 숲을 이루듯이 정박해 있었다. 지세포에서 보면 옥림쪽이 배가 숲을 이룬 것처럼 보여 ‘배숲개(舟林浦)’라고 동네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불과 100년 전의 모든 역사기록에도 옥림마을이 ‘주림포(舟林浦)로 표기되어 있다. 어찌되었건 역사기록에서 증명하듯, 지세포만은 고대로부터 15세기까지 일본으로 향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기착지(寄着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주1] 대내전(大內殿) 일본 전국시대 서부 혼슈와 큐슈 북부 지방을 세력권으로 기반한 오우치(大內)가문을 뜻한다. 당시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무역을 활발히 행하였던 지방의 강력한 다이묘였다. 오우치 다이묘(大內殿)
[주2] 소이전(小二殿) : 소이전은 소이만정(小貳滿貞)을 지칭. ‘貳’를 ‘二’로 쓰는 것은 우리나라 기록의 통례이다. 도노[殿]는 군장(君長)에 붙이는 존칭. 또 그 거처를 뜻하기도 한다. 대마도주 종(宗)씨의 조상을 대마수호대(對馬守護代)로 삼은 것은 소이씨였으며, 이때에도 역시 종주(宗主)였다. 《해동제국기》에도 “소이전은 재부(宰府)에 산다. 재부는 대도독부(大都督府)라 부르기도 하는데, 서북으로 박다(博多)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주3] 회례사(回禮使) : 조선 시대, 일본에서 보내온 사절에 대한 답례로 일본으로 보내던 사절.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사신인 보빙사(報聘使)와 유사 함.
[주4] 통신사(通信使) : 조선 시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
[주5] 경차관(敬差官) : 조선 시대, 지방에 국방·외교 업무를 띤, 임시로 내려 보내는 벼슬을 이르던 말인데 대마도로 파견時에 사용함.
[주6] 선위사(宣慰使) : 조선 시대, 외국의 사신이 입국했을 때 그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파견하던 임시 관직
[주7] 동정(東征) : 1396년(태조 5) 10월에 왜구(倭寇)가 동래(東萊)ㆍ울진(蔚珍) 등지에 침입하므로, 12월에 김사형(金士衡) 등을 보내어, 일기(壹岐)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한 일을 가리킨다.

3) 여말선초(麗末鮮初) 조선통신사(회례사) 파견

고려 말기의 여일(麗日) 관계는 여원연합군의 정벌과 왜구의 침구(侵寇 침략과 노략질)로 인해 지극히 위태로웠다. 당시 ①1292년(충렬왕18) 몽골에 의해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태복윤(太僕尹) 김유성(金有成), 원나라의 조양필(趙良弼)이 선유사(宣諭使)로, 곽린(郭麟)은 서장관(書狀官, 문서의 기록을 담당)으로 일본에 갔다. 이 때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집권하던 시기로서 동정(東征)한 데 원한을 품고 구류되어 있다가 모두 일본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②공민왕(恭愍王) 때에는 김룡(金龍)과 김일(金逸)을 금적사(禁賊使)로 보냈는데, 일본 조정은 애매한 태도를 취했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일본 막부와 고려 정부의 협조는 어느 정도 접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③우왕(禑王) 원년에는 나흥유(羅興儒)를 파견하였고, 1377년(우왕3)에는 안길상(安吉祥)을 보내었으며 같은 해에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길상은 병사하였고, 나흥유와 정몽주는 구금되었다가, 1378년 7월에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던 윤명, 안우세 등 수백 인을 데리고 귀국하니 성공적인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여일관계에 있어서의 사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이후 ④같은 해 10월에는 이자용(李子庸)과 한국주(韓國柱)를, 5년에는 윤사충(尹思忠)을 보내어 보빙(報聘 답례 방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의 일본통신사들은 때로 평화교린의 상황에서 사행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목숨을 담보로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⑤1394년(태조 3) 5월28일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 김거원(金巨原)이 중 범명(梵明)과 더불어 사로잡혀 갔던 본국인(本國人) 5백 69명을 거느리고 왔고

⑥1394년(태조 3) 10월11일 최용소(崔龍蘇)가 일본회례사(回禮使)로 일본 구주(九州)에 파견되어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미카와(令州了俊)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마카와가 차견(差遣)한 승려 종구(宗俱)와 함께, 1395년(태조 4) 7월10일 피로인 57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⑦1408년(태종 8) 3월 14일 일본 통신관(日本通信官) 부사직 박화(朴和)가 본국(本國)에서 잡혀간 사람 남녀 백여 인을 추쇄(推刷)해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1410년(태종 10) 4월 14일 사직(司直) 박화(朴和)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지좌전(志佐殿) 원추고(源秋高)가 형부 대랑(刑部大郞)을 보내어 호송(護送)하고, 예물(禮物)을 바쳤다.

⑧1409년(기축년) 2월에 박화를 지좌전에 사신으로 보냈으니, 붙잡혀 간 남녀(男女)를 구(求)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1413년(태종 13) 12월1일 통신관(通信官) 검교(檢校) 공조 참의 박분(朴賁)을 일본에 보내기 위해 경상도 도관찰사에게 명령하여 호피(虎皮)·표피(豹皮) 10장과 잣[松子] 10석을 주어 보내게 하였다. 다음해 1414년 2월1일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박분(朴賁)이 경상도 지경에 이르렀으나 통신행렬을 중지 시켜 되돌아오게 했다.

1419년 대마도 정벌 후 일본통신사 기록을 살펴보면, ⑨세종 2년(1420년) 윤1월 15일, 일본에서 사절을 보낸 데 대한 답례로 1420년(세종 2) 10월8일 일본국회례사(日本國回禮使)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를 임명, 10월25일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 인녕부소윤(仁寧府少尹) 송희경(宋希璟)을 답례로 보내게 된다. 이때에는 부산을 출발하여 돌아올 때는 제포(웅천)에 도착하여 김해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⑩1422년(세종 4) 12월 20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박희중(朴熙中)과 부사(副使) 이예(李藝) 등이 길을 떠나니, 각각 옷 한 벌씩과 모관(毛冠)·갓[笠]·신[靴]과 약품을 내리고, 서장관(書狀官)인 봉례랑(奉禮郞) 오경지(吳敬之)와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 등에게 각각 모의관(毛衣冠)·갓·신을 내렸다. 1423년(세종 5) 10월13일 일본국회례사(日本國回禮使) 서장관(書壯官) 봉례랑 오경지(吳敬之) 등이 돌아왔다. 1424년(세종 6) 2월 7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등이 배사(拜辭)하였다. 10월 7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박안신(朴安臣)이 거느리고 간 선군(船軍) 중 사망한 16명의 초혼제도 또한 지내게 하였다.

⑪1428년(세종 10) 11월26일에는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박서생(朴瑞生)이 임명되었고 12월7일 일본통신사 대사성(大司成) 박서생(朴瑞生), 부사(副使)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서장관 전 부교리(副校理) 김극유(金克柔)가 일본의 대내전과 소이전에 물건을 보내게 하였는데, 1429년(세종 11) 12월 3일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일본 국왕 원의교(源義敎)의 답서(答書)를 바쳤다.

⑫일본국(日本國) 통신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고득종(高得宗)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윤인보(尹仁甫) 등이 1439년(기미년) 8월에 선편(船便)으로 출발하여 1440년(세종 22) 경신년 5월에 돌아왔다. 특히 이예(李藝)는 사신으로 다녀온 총 40여 차례 대부분을, 거제도를 경유하여 대마도와 큐슈 등지를 다녀왔다. 1419년 이종무 대마도정벌 時 통역관 및 보좌관으로 다녀온 후부터 거제도 지세포를 출발지로 이용하니 이후부터 통신사 일행들은 자연스레 거제도를 경유하게 되었다.

⑬1442년(세종 24)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신하를 서장관으로 삼아야 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뽑혔다. 일본에 이르자,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써 주어 모두가 감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통신사 일행과 함께 쓰시마(對馬島)에 들러 무역 협정인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었다. 1443년(세종 25) 계해년에, 일본국 통신사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 부사 대호군 윤인보(尹仁甫), 종사관(從事官) 훈련원 주부(訓鍊院注簿) 신숙주(申叔舟)가 동년(同年) 2월에 선편으로 출발하여 동년 10월에 돌아왔다고 되어있다. 조위(曺偉)의 서형(庶兄) 조신(曺伸)은 역관으로 동행하였고 이 후 2차례 더 일본을 다녀왔다.

⑭1459년(세조 5) 8월23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을 일본국(日本國)의 통신사(通信使)로 삼고, 행호군(行護軍) 이종실(李從實)을 부사(副使)로 삼고, 선군(船軍) 한을(韓乙), 종부시 주부(宗簿寺注簿) 이근(李覲)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예물(禮物)을 가지고 수미(秀彌)와 더불어 일본국(日本國)에 함께 가도록 하였다. 10월 8일 새벽에 1백여 인이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使臣)의 배 2척과 대마도(對馬島) 왜선(倭船) 2척과 함께 거제도 지세포에서 출발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 풍랑을 만나 폐몰하였다.

⑮1475년(성종 6) 을미년에는 일본국 통신사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배맹후(裵孟厚)라고 되어 있고 1477년(성종 8)에는 일본국 통신사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 배맹후와 부사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 채수(蔡壽)는 차출되어 행장(行裝)을 갖추었으나 모두 보내지 말라는 전교를 받았다.

⑯1476년(성종 7) 7월 26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중추(倭中樞) 평무속(平茂續)·첨지(僉知) 피고여문(皮古汝文)·호군(護軍) 원무기(源茂崎), 특송(特送) 조국차(助國次)와 지세포(知世浦)를 출발하여 대마도의 서북쪽에 있는 사수나포(沙愁那浦)에 도착했다. 돌아올 때는 부산포를 거쳐 왔다.

⑰1479년(성종 10) 기해년에는 일본국 통신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형원(李亨元),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 종사관 김흔(金訢), 조신(曺伸) 등이 차출되어 길을 떠났으나 정사(正使) 이형원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에 걸려 돌아오다가 지세포(知世浦)에서 죽자 일행을 모두 되돌아오게 하였다.

⑱1487년(성종 18) 3월 26일 대마도(對馬島) 선위사(宣慰使) 정성근(鄭誠謹)이 사조(辭朝)하니, 명하여 대접하게 하였다. 6월 10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정성근(鄭誠謹)이 와서 복명(復命)하자,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정성근이 아뢰기를, “신(臣)이 5월 초2일 진시(辰時 오전7~9시)에 배를 출발하였는데, 그날 바람이 순조롭기 때문에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대마도(對馬島) 땅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초기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은 서울(한양)에서 출발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약 7개월~11개월가량 걸렸다. 사신의 행차 길에는 많은 수의 수행원과 수많은 화물이 동반되었고 바다의 뱃길도 순탄치 않아 항구에서 대기하는 날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의 경우 한일관계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왜구의 노략질 문제였고,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마도주나 막부장군에게 통신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의 표면적 이유는 왜구 금압의 요청과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장군습직 축하 등 주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였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되는 일본국왕사의 주 임무는 동(銅)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콩·목면을 구해가는 경제적인 목적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가져가는 문화적 목적이기도 했다.

4) 여말선초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 개괄

여말선초 사절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마도 땅에 기근이 들 때마다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마도 정벌은 이전(以前) 고려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여몽정벌군∙여말선초정벌군 모두 거제도 해상을 이용했다. 당시 한산도 용초도 추봉도 비산도 매물도 등은 모두 거제현(巨濟縣)의 부속 섬이었다.]

첫 번째의 대마도 정벌(東征)은 고려말 1389년(고려 창왕 2년) 음력 2월에 박위(朴葳 ?~1398년)가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거주지를 대부분(盧舍殆) 진멸(盡滅)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찾아왔다.

두 번째는 1396년(조선 태조 5년) 음력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 1333∼1407)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남재(南在), 신극공(辛克恭)과 더불어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세 번째 정벌(己亥東征)은 1419년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이숙무(李叔畝)·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로,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척과 기선군정(騎船軍丁)을 거느려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각 도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그 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7285명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이종무(李從茂)의 정벌군은 6월 19일 거제도 남단 주원방포(周原防浦 추봉도)에서 출발하였다. 20일에 먼저 선발대 김사형(金士衡)의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하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뒤이어 이종무의 대선단이 도착하였다.

7월 3일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총14일 걸린 대마도정벌이었다.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고 또한 그들의 죄는 묻고, 약탈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정벌의 본래 목적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해동정(己亥東征)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하며, 또 강력한 무력시위로 왜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협을 준 것도 사실이다.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대마도정벌(東征) 후 즉시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의 해적들이 차차 평화적 내왕자(商倭·客倭)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 3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국가의 근심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대일외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5) 거제도 지세포, 통신사절단 출발지(出發地) 및 기착지(寄着地)

경남 거제시 지세포(知世浦)는 기원 전후부터 거제도의 다대포 아주(옥포)와 더불어 고대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백제나 가야국이 일본으로 향해하는 기착지(寄着地)의 역할을 했고 몽골의 일본정벌, 조선의 대마도정벌 모두, 거제도 지세포만에서 대기했다가 해상의 풍랑과 일기를 살핀 후에 대마도로 향하였다. 이는 남쪽으로부터 동해로 흐르는 쿠루시오 난류(쓰시마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마도로 가는 뱃길이 거제도를 거쳐 가는 것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말선초 공식적으로 20여 차례나 이루어진 일본 외교사절단(外交使節團) 중에 두세 차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거제도를 경유하여 대마도로 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419년 대마도정벌과 더불어 남해안에 수군진영이 구축되어 남해안이 안정을 되찾고, 최전방 거제도에 각 수군진영이 섬을 빙 둘러 설치되면서 1443년(세종 25)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게 되기에 이른다.

이로부터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들이 거제시 지세포에서 대기했다가 대마도 항해길에 올랐다. 지세포 수군진영의 만호(萬戶)는 대마도 어부들이 고초도(孤草島 거문도)와 여서도(전남 완도군)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자가 오고갈 때 문인(文引)을 확인하고 어세(漁稅)를 납부 받았는데 이는 대부분 일본으로 향하는 사신들의 접대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지세포에는 전사(傳舍) 즉, 관원(官員)을 대접(待接)하여 묵게 하는 객사와 관청, 세관(稅關), 객주(客主), 그리고 여행객(旅行客)의 여독(旅毒)을 풀고 향락을 맡아하던 기방(妓房)과 의원(醫院) 등을 모두 갖추게 된다. 지세포(知世浦)에 거류(居留)하는 왜인들도 생겨났고, 선박을 수리 건조하는 조선소는 물론, 전선(戰船)이나 어선, 선박의 정박지(碇泊地)에 시설물이 들어섰으며, 더불어 수군(水軍)들이 수자리 살던 마을이 곳곳에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조선정부의 사신이 파견될 때마다 통신사(通信使) 영빙선(迎聘船)인, 일본막부 신사(信使)의 배들과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왜선(倭船)들이 드나들곤 했다. 그리고 일본을 향해 떠나기 전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바닷가에서 반드시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조선전기 세조에서 성종 시기에 그 항구의 성대함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후 왜인들의 계해조약의 위반사례가 많아져 조금씩 쇠퇴의 길을 걷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삼포왜란이 일어나고 일본통신사가 부산포를 이용함에 따라 자연스레 쇠퇴∙소멸하였다.

지세포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초기 사절단으로서,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신들과 수행원 격군 등이 있다. 1424년(세종 6) 박안신(朴安臣) 이예(李藝), 1428년 김극유(金克柔) 박서생(朴瑞生), 1439년 고득종(高得宗) 윤인보(尹仁甫), 1443년(세종 25) 신숙주(申叔舟) 변효문(卞孝文) 윤인보(尹仁甫) 조신(曺伸) 등이 있다. 변효문은 돌아올 때 거제시 옥포에 도착했다. 특히 이예(李藝)는 40여 차례 대마도를 오고가면서 대부분 지세포 항구를 이용했고 그 아들 이종실(李宗實)도 지세포에서 대마도로 향하였다.

1459년(세조 5)에는 송처검(宋處儉)과 부사(副使) 이종실(李宗實), 서장관(書狀官) 이근(李覲), 선군(船軍) 한을(韓乙) 등 1백여 인이 지세포에서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새벽에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使臣)의 배 2척과 대마도(對馬島) 왜선(倭船) 2척과 함께 출발하였다.

그리고 1476년(성종 7) 7월 26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중추(倭中樞) 평무속(平茂續)·첨지(僉知) 피고여문(皮古汝文)·호군(護軍) 원무기(源茂崎), 특송(特送) 조국차(助國次)와 지세포(知世浦)에서 출발하여 대마도 서쪽에 있는 사수나포(沙愁那浦)에 도착했다.

또한 1479년(성종 10) 기해년에는 일본국 통신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형원(李亨元),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 종사관 김흔(金訢), 조신(曺伸) 등이 차출되어 지세포에서 항해길로 나섰다가, 정사(正使) 이형원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에 걸려 돌아오다가 지세포(知世浦)에서 죽자 일행을 모두 되돌아오게 하였다.

6) 계해조약(癸亥條約)

고려 말부터 왜구가 우리나라 연안을 약탈하는 등 침입을 일삼자 1419년 그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뒤 조선은 통교를 중단하였다. 이에 왜구들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고, 대마도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금압을 서약하면서 통교를 간청하였다.

1426년 조선은 그들의 간청도 있고, 또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무역을 허락하는 한편, 삼포와 서울에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그곳에 한해서만 왜인들의 숙박과 무역을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마도주에게 입국증명서(圖書•書契•行狀•文引)를 만들어주어 입국하는 왜인은 이를 소지하도록 하였으며, 사송선(使送船)과 무역선(세견선)도 그 수를 제한하였다.

또한 1438년 대마도주의 세견선(歲遣船)에 대하여 25척씩 나누어 삼포에 도착하게 하는 균박법(均泊法)과 윤차적으로 머무르게 하는 삼포윤박법(三浦輪泊法)을 실시하였다. 입국 왜인의 수는 제한하여 그 크기에 따라 대선 40인, 중선 30인, 소선은 20인으로 규정하였으며, 증명서 없이 왕래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이렇게 조금씩 교류를 완화하는 정책을 펴나가다가 1443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이 귀환길에 대마도주 소사다모리(종정성宗貞盛)와 구체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1)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년(세종 25)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 이예(李藝) 등의 사절단이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과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대해 조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세견선은 50척으로 할 것, 삼포에 머무르는 사람의 체류기간은 20일로 하며 상경자(上京者)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은 50일로 한해 이들에게 식량을 지급할 것, 좌선인(坐船人)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할 것, 고초도(孤草島)에서 어획하는 자는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문인(文引)을 받아 어세(漁稅)를 낼 것 등이었다.

왜인이 개항장에 도착한 후부터 본국으로 귀환시까지 비용은 조선측이 부담했는데, 그 접대비용과 세역미두가 너무 많아 재정긴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긴축정책은 앞서 마련된 법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예외취급이 너무 빈발해서, 왜인들은 이를 위반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등 모순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이후 삼포왜란(三浦倭亂)의 원인이 되었다.

(2) 조어금약(釣魚禁約) 해동제국기종(海東諸國記終) / 신숙주(申叔舟)
대마도 사람으로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도주(島主)의 도서(圖書)와 문인(文引) 3통을 받아서 지세포(知世浦 거제도)에 도착하여 문인을 바치면, 만호(萬戶)가 문인을 다시 만들어 준다. 고초도(孤草島)의 정해진 곳 외에는 아무데나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하며, 고기잡이를 마치면 지세포(知世浦)에 돌아와서, 만호에게 문인을 돌리고 세어(稅魚)를 바친다. 만호는 도주의 문인에 회비(回批)하여 인(印)을 찍어 돌려 줌으로써 서로 증거로 삼는다. 만약 문인이 없는 자이거나, 풍랑을 감내하지 못한다 핑계하고 몰래 무기(武器)를 가지고 변방 섬에 횡행하는 자는 적(賊)으로서 논죄(論罪)한다.[對馬島人釣魚者 受島主三着圖書文引 到知世浦納文引 萬戶改給文引 孤草島定處外 勿許橫行 釣魚畢 還到知世浦 還萬戶文引 納稅魚 萬戶於島主文引 回批着印 還付爲驗 若無文引者 稱不勝風浪 潛持兵器 橫行邊島者 以賊論]

계해약조로 인하여 대마도인들이 거제시 지세포에 어세를 납부하고 남해안의 평화로운 조업은 실제로 약50년 간 정도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1467년 이후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각 지역 군웅들의 할거와 쟁투가 뚜렷해지는 격동의 시대가 되었다. 이후 100년 가까이 지속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이 열리면서 변방의 주민을 통제할 힘을 잃게 되었다.

1493년 경상감사 이극돈(李克墩)의 장계에 따르면, “1485년 을사년에 왜의 소선 11수(艘)가 마지막으로 세를 바쳤을 뿐이고, 그 뒤 각년(各年)에는 한 사람도 문인을 받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계해약조는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대마도주와 형식적인 조약으로써, 유명무실하지만 실효적 조약으로써 남아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사절단의 거제도 체류경비 문제가 발생하여, 이때부터 일본통신사는 대부분 부산포를 이용하게 되었다.

7) 조선초기(15C) 일본사절단 예물(禮物) 품목

15세기 초기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발전된 불교의 전수를 받기위하여 대장경 및 주해(注解)한 여러 경서(經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세종 6년(1424) 박안신(朴安臣)과 이예(李藝) 등이 일본 회례사(回禮使)로 갈 때, 금자(金字)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密經)》 1부와 금자 《아미타경(阿彌陀經)》 1부, 금자 《석가보(釋迦譜)》 1부, 청지(靑紙)에 금자로 쓴 단본(單本) 《화엄경(華嚴經)》 1부, 《대장경(大藏經)》 1부를 토산물(土産物)과 함께 보낸다.

그리고 세조 5년(1459년) 통신사 송처검(宋處儉)이 일본을 방문할 때에 일본에서 청구한 대장경(大藏經) 1부(部), 법화경(法華經) 2부, 금강경(金剛經) 2부, 금강경 십칠가해(金剛經十七家解) 2부, 원각경(圓覺經) 2부, 능엄경(楞嚴經) 2부, 심경(心經) 2부, 지장경(地藏經) 2부, 기신론(起信論) 2부, 영가집(永嘉集) 2부, 증도가(證道歌) 2건(件), 조학사(趙學士) 서체의 증도가(證道歌) 2건, 고봉선요(高峯禪要) 2부, 변역명의(飜譯名義) 2부, 성도기(成道記) 2부 즉, 불경과 불교 관련 물품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면서 일본국왕(실제 막부)에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안부를 묻고 옛날의 정의를 돈독히 하여 날로 더욱 새롭게 발전되기를 바란다는 서신과 함께 무려 40여종의 예물을 보내면서 일일이 열거하여 기록하였다. 이는 대부분이 일본의 요청에 의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명주(明紬) 3백 필, 백금(白金) 5백 냥(兩)을 사절단에게 주어 우리나라에 없는 서적 등을 사 오도록 한 것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심과 도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는 표피(豹皮)∙호피(虎皮)∙인삼(人蔘)이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 물품이었다. 거제도 지세포 만호(萬戶)는 거제도 체류경비 조달은 물론이거니와, 통신사 일행이 대마도를 향해 떠날 때, 거제産 ‘고라니 노루 고슴도치’ 가죽을 사절단 일행에게 선물하였고 이 물품은 일본 행차 길에서 사절단의 개인用 구입선물 비용에 전용(專用)하였다 한다.

1459년 세조가 일본국왕에게 보내는 서신과 예물 외에도, 신하로서 예조판서 홍윤성(洪允成)이 일본의 대내다다량공(大內多多良公), 전산수리대부원공(畠山修理大夫源公), 좌무위원공(佐武衛源公), 관령(管領), 경극좌좌목시(京極佐佐木氏) 대선대부 원공(大膳大夫源公)에게도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냈다. 또한 예조참판 황효원(黃孝源)은 관서도 대우원공(大友源公)에게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냈다.

예조참의 서거정(徐居正)은 대마주(對馬州) 태수(太守) 종공(宗公)족하에게 서신과 예물을 보내고, 예조좌랑 김영견(金永堅)은 일기주(一岐州) 태수(太守) 지좌원공(志左源公)과 일기주 좌지원공(佐志源公)에게 서신과 예물을 함께 보냈음이 특이할 만 하다 하겠다.

(1) 15세기 조선이 일본으로 보낸 예물(禮物) 품목

① 세종 6년(1424년) 일본 회례사(回禮使)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등.

신물(信物 증표)로 금자(金字)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密經)》 1부와 금자 《아미타경(阿彌陀經)》 1부, 금자 《석가보(釋迦譜)》 1부, 청지(靑紙)에 금자로 쓴 단본(單本) 《화엄경(華嚴經)》 1부, 《대장경(大藏經)》 1부, 대홍라 가사(大紅羅袈裟)에 초록라(草綠羅)로 장식한 것 한 벌과 자라괘자(紫羅掛子)에 아청라(鴉靑羅)로 장식한 것 한 벌, 남라장삼(藍羅長衫) 한 벌, 흑세마포(黑細麻布) 15필, 홍세저포(紅細苧布 붉고 가는 모시) 15필, 백세저포(白細苧布 흰 모시) 15필, 만화석(滿花席) 35장, 잣[松子] 5백 근, 인삼(人蔘) 1백근, 청밀(淸蜜) 20두(斗), 표피(豹皮) 5장, 호피(虎皮) 5장, 각색 사피(各色斜皮) 10장, 검붉은 사피[紫斜皮]로 만든 승혜(僧鞋 스님 신발) 한 켤레.

[주1] 대홍라 가사(大紅羅袈裟) : 아주 붉은 비단으로 만든 승려(僧侶)가 입는 법의(法衣).
[주2] 자라괘자(紫羅掛子) : 예전에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소매가 없고 뒤 솔기를 길게 허리까지 째어 전투복으로 만든 옷을 이르던 말.
[주3] 아청라(鴉靑羅) : 검푸른 빛깔의 비단
[주4] 남라장삼(藍羅長衫) : 승려의 남빛 비단 웃옷, 검은 베로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듦. 
[주5] 만화석(滿花席) : 여러 가지 꽃무늬를 가득하게 놓아서 짠 돗자리  

② 세조 5년(1459년) 조선이 준비한 예물(禮物),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

<일본에서 청구한 대장경(大藏經) 및 주해(注解)한 여러 경서(經書)와 토산물(土産物) 별폭(別幅)의 예물(禮物) 품목>

[대장경(大藏經) 1부(部), 법화경(法華經) 2부, 금강경(金剛經) 2부, 금강경 십칠가해(金剛經十七家解) 2부, 원각경(圓覺經) 2부, 능엄경(楞嚴經) 2부, 심경(心經) 2부, 지장경(地藏經) 2부, 기신론(起信論) 2부, 영가집(永嘉集) 2부, 증도가(證道歌) 2건(件), 조학사(趙學士) 서체의 증도가(證道歌) 2건, 고봉선요(高峯禪要) 2부, 변역명의(飜譯名義) 2부, 성도기(成道記) 2부.  소종(小鍾) 2사(事), 운판(雲板) 2척(隻), 동발(銅鈸) 5부, 경자(磬子) 5사(事), 석등잔(石燈盞) 5사(事), 말 안장[鞍子] 1면(面), 여러 가지 연구(緣具 관련악기), 흑세마포(黑細麻布) 20필, 백세저포(白細苧布) 20필, 백세면주(白細綿紬) 20필, 남사피(藍斜皮) 10장(張), 인삼(人蔘) 1백 근(觔), 표피심(豹皮心)·호피변(虎皮邊)·전피리(捵皮裏)의 깔개[坐子] 1사(事), 표피(豹皮) 10장, 호피(虎皮) 10장, 잡채화석(雜彩花席) 10장, 만화석(滿花席) 10장, 만화방석(滿花方席) 10장, 잣[松子] 4백 근, 청밀(淸蜜) 15두(斗)를 부송(付送)한다. / 그리고 명주(明紬) 3백 필, 백금(白金) 5백 냥(兩)을 가지고 가서 우리나라에 없는 서적(書籍) 등류의 물건을 사오게 하였다.]

그 외 기타 개인 품목으로, 홍색 전모(氈帽) 1개, 상모 옥정자(象毛玉頂子)·도금대(鍍金臺)·옥압영(玉壓纓)·자초영(紫綃纓), 흑사피(黑斜皮) 3장, 변아침석(邊兒寢席) 15장, 갱미(粳米)메쌀 20석(石), 소주(燒酒) 50병, 밀과자(蜜果子)꿀과자 5궤(櫃), 다식(茶食) 5궤(櫃)이 있었다.
 
[주1] 운판(雲板) : 선종에서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기구. 청동(靑銅)으로 된 판을 구름 모양으로 만든 것. 형상으로 이름함. 죽이나 밥을 끓일 때에 세 번 치므로 화판(火板), 끼니 때에 길게 치므로 장판(長板)이라 함.
[주2] 동발(銅鈸) : 쇠붙이로 만든 타악기의 하나. 놋쇠로 된 냄비 뚜껑과 비슷한 악기로, 뒤에는 손잡이로 사슴 가죽을 달고 붉은 비단 끈을 늘어뜨린 모양이며 두 개가 한 벌이다. 자바라(啫哱囉)의 일종이다.
[주3] 경자(磬子) : 뿔 망치로 쳐 소리를 내는, 옥이나 돌로 만든 아악기(雅樂器).  
[주4] 흑세마포(黑細麻布) : 검고 가는 삼베. / 백세저포(白細苧布) : 희고 가는 모시. / 백세면주(白細綿紬) : 흰색 고운 명주. / 남사피(藍斜皮) : 남빛 돼지가죽. / 흑사피(黑斜皮) 검은색 돼지가죽.
[주5] 표피심(豹皮心)·호피변(虎皮邊)·전피리(捵皮裏) : 표범 호랑이 가죽을 늘려서 만든 것으로, 일본이 조선초기 인삼과 더불어 가장 선호하는 물품이었다.
[주6] 잡채화석(雜彩花席) : 여러 가지 빛깔로 아름다운 무늬를 놓은 돗자리. / 만화석(滿花席) : 여러 가지 꽃무늬를 가득하게 놓아서 짠 돗자리.
[주7] 청밀(淸蜜) : 꿀벌이 꽃의 꿀샘에서 빨아들여 벌집 속에 저장하여 둔 달고 끈끈한 액체.
[주8] 명주(明紬) : 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옷감. 세는 단위는 필(疋)이고, 50필을 1동이라 한다
[주9] 전모(氈帽) : 조선 시대, 비 올 때 여자 하인이나 아이들이 맨머리에 쓰던 갓의 한 가지. 대테에 살을 대고 종이를 바른 뒤에 기름에 결어 만든다.
[주10] 상모 옥정자(象毛玉頂子)·도금대(鍍金臺)·옥압영(玉壓纓)·자초영(紫綃纓) : 벙거지(모자나 갓)의 꼭지에다 참대와 구슬로 장식(裝飾)하고 그 끝에 백로의 털이나 긴 백지 오리를 붙인 것으로 갓 꼭대기에 옥으로 만들어 단 장식(裝飾). 갓끈에 구슬을 달고 아름답게 도금하였고 자주색 명주실로 갓끈을 만들었다.
[주11] 변아침석(邊兒寢席) :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잠자리에 까는 돗자리.
[주12] 다식(茶食) :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하여 적당한 넓이와 모양으로 빚어서 바싹 말린 후, 기름에 튀기어 꿀 또는 조청을 발라 튀밥이나 깨고물을 입힌 조과(造菓)

(2) <대마도주가 진상한 품목>

① 세조 5년(1459년) 일본 원추고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물건 : 조미(造米) 5백 석(石), 유분(鍮盆)놋쇠 동이 4척(隻), 매(鷹) 한 쌍(雙), 사냥개(獵犬) 한 쌍(雙).

② 세조 9년 계미년(1463)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통해 보낸 토물(土物) : 별폭(別幅 물품 종류를 적은 종이)은 채화선(綵畫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흑칠잡색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  그 외 병풍(屛風) 1좌(坐), 숙녹비(熟鹿皮)2장(張), 면포(綿布 무명 피륙) 수십 장이 있었다.

③ 성종 1년 경인년(1470)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바친 토산물 :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염료 4포(包)보따리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

[주1] 별폭(別幅) : 물품(예물) 종류를 차례로 적은 종이.
[주2] 조미(造米) : 매갈이.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아니한 쌀.
[주3] 채화선(綵畫扇) : 채색(彩色) 그림이 그려진 부채.
[주4] 대홍칠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홍칠천방분(大紅漆淺方盆) 홍칠흑칠잡색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 아주 붉게 옻칠한 나무수레와 놋그릇, 네모난 동이, 붉고 검은 잡색의 나무통.  
[주5] 숙녹비(熟鹿皮) : 잘 매만져서 부드럽게 다루어 놓은 사슴의 가죽.

④ 대마도에 체류하며.

① 대마도주가 사절단에게 선물한 물품 : 환도(環刀)·장검(長劍)·선자(扇子)·전촉(箭鏃 화살촉)·다엽(茶葉 찻잎)·호초(胡椒 후추)·치자(梔子)·아청 단자(鴉靑段子 광택이 많고 두텁고 무늬가 든 비단)·초록 단자(草綠段子 비단)·남단자(藍段子 남빛 비단).
② 성종 7년(1476)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대마도에서 사절단의 경비로 사용한 물품 : 환도(環刀 군도) 1병(柄)  호초(胡椒 후추) 2근(斤), 다엽(茶葉 찻잎) 3근(斤) 화포(貨布 통용 화폐) 면포(綿布 솜 피륙).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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