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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어업조합,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조합
한국 최초의 어업조합,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조합
  • 전갑생 시민기자
  • 승인 2015.05.26 19:5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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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거제 근현대사 100선> 아홉 번째 이야기

근대 자본주의 조합의 탄생

바다는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제의 생명줄이었다. 1971년 거제대교가 가설되기 이전 거제 사람들은 바다에서 물고기, 해초 등 각종 해산물을 잡아서 집도 짓고 땅도 사고 자식들 공부까지 시켰다. 대지는 ‘어머니’이라고 모정을 느끼게 한다지만, 바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거제 사람들은 “바다가 우리를 있게 한 생명줄”이라고 말한다. 거제 장목에서 저구에 이르는 바다는 조선 제일의 어장이었다.

아쉽게도 중세시대 바다는 일반 사람들이 가질 수 없었다. 일찍부터 조선 왕실은 거제 일대의 어장 전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왕은 왕비나 후궁에게 아이를 낳거나 양육비 대신 어장을 줬다. '기로소'라는 조선시대 나이든 고위 문신들의 친목 기관은 자주 왕에게 거제지역 어장을 떼어 줄 것을 요구했다. 거기에 조선후기 삼도수군통제영은 군비와 무기 등을 제작하는데 거제어장에서 나오는 세금 전부를 가져갔다.

일반 ‘인민’들은 120년 전 1895년 갑오개혁 이전에 단 한 곳의 어장도 소유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소작농’처럼 고용되어 일한 품삯만 받아 생활했다. 그러나 통제영이 폐지되자 거제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앙에서 파견된 어장관리자 어기파원(漁基派員)은 국영 어장 중 일부를 개인 명의로 옮기고 일반인들에게 넘겨진 어장마저 가로채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1856년 3월 거제 386곳의 어장 중 왕실 소유 어장은 150곳이었다. 이 150곳 어장은 시쳇말로 ‘알짜배기’ 중 최고였다. 왕실은 1908년 3월 어장을 일본인 카시이 겐타로(香推源太郞)라는 자본가에게 20년 대부계약을 맺고 넘겨주었다.

한산·가조도 사람들은 예전부터 공동체에서 관리하던 어장마저 빼앗길 운명에 처했다. 1908년 3월 거제어조대표 정범용(鄭範鎔) 등은 통감부와 농상공부에 민간 소유 어기(어장과 동일한 말), 어조(漁條, 물고기가 나니는 길에 어망을 설치해 고기 잡는 방법), 어장(漁場, 고기가 모여는 드는 곳)을 왕궁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부당하게 침범 당하는 일이나 일본인 카시이에게 대부하지 말 것을 청원했다.

어민의 청원을 묵살한 왕실 제실재산정리국은 1908년 5월 11일 일부 궁내·경리원의 소관 어기, 미역밭 등을 일반에 공개경쟁 입찰로 넘겼다. 이 어기와 미역밭(모곽전) 등은 1908년 6월 22일부터 1909년 3월 30일까지 해당 지역에서 고기를 잡거나 채취할 수 있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 어기파원의 횡포. 대한제국 시기 일부 중앙관료들은 거제지역 어장을 강제로 소유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어기파원 김봉수다. 훗날 그는 어장 문제에 휩싸여 곤혹을 치룬다.
능포동월조부설유적지. 조선시대 왕실어장 능포 바다. 1908년 일본인이 조선왕실 소유의 능포어장을 대부받았다.

다시 빼앗긴 바다

이때 한산·가조도 사람들은 일본의 ‘구미아이(組合)’를 모방해 자체적인 조직을 결성한다. 이미 한국에는 1903년 부산에 조선해수산조합이 조직되었다. 일본은 1886년 5월 홋카이도(北海道)뿐만 아니라 몇몇 지역에서 어업조합 규칙을 만들어 조선 바다 침략을 준비했다.

조합에 가입된 일본어민들은 거제도를 비롯한 서·동해에 진출해 계절마다 어로활동과 이주 어촌 등을 건설한다. 물론 일본인들은 거제에 계절어기 근거지와 이주어촌 구조라, 장승포 등 10 곳을 건설했는데 주로 어장을 노리고 있었다.

급변하는 시대에 쫓아 자신들의 어장과 바다를 지키고자 가조·한산도 사람들은 1908년 7월 10일 한국 최초의 어업조합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巨濟閑山加助漁基組合, 이하 어기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조합(巨濟閑山毛藿田組合, 이하 모곽전조합)’을 조직한다.

어민들은 정부의 농상공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내는데 같은 해 7월 그 산하 수산국장 정진홍이 거제에 내려 온 계기로 가능했다. 모곽전조합의 경우 1896년 제주 해녀들이 저구에서 왕실 어장 내 우뭇가사리와 은행초 등을 발견해 해조류 채취에 나섰다. 해녀 100여 명은 저구에 근거지를 두고 매년 왕실에다 사례금 혹은 세금 50원을 납부했다. 해녀들은 과도한 세금에 대응하고자 모곽전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여기서 두 조합은 행정구역 상 1900년 신설된 진남군 한산면과 가좌면에 있었다.

여러 차례 언급된 거제군수 고희준은 1908년 12월 모곽전조합의 모곽세 1,100원, 어기조합 소유 어기 판매대금 3,600원 등을 학교에 기부한다고 모금했다. 고 군수는 백성들의 어장을 탐하고 헌병과 순사까지 동원해 온갖 횡포를 부렸다. 어민들은 군수에게 순사들의 불법을 신고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인 어민들이 장목, 장승포, 구조라, 저구, 도장포 등지에 들어와서 조선인 어장을 차지하고 어업 면허를 받아냈다.

거제 바다의 어장은 욕심 가득한 군수에게 빼앗기고 침략 일본 자본가에게 또 빼앗기고 있었다. 심지어 어기조합 간부 일부와 외지인이 1910년 ‘작당’해 조합의 어장을 통째로 장악하려고 했다. 또한 거제·통영 사람들은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와 어기조합 어장 문제를 놓고 법정 투쟁까지 이어졌다. 대한제국과 일본의 침략이 극에 달하는 허점을 노리고 일부 한국 관리는 거제 어장을 사리사욕에서 챙기려고 했다.

거제어업조합의 연혁을 담은 “조선어업조합요람”(조선어업조합중앙회, 1942년). 이 책에는 “거제어업조합의 전신은 멀리 융희2년 즉 명치41년 7월 10일 농상공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 및 거제한산모곽전조합을 각각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동43년 양 조합을 합병하여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전조합”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제국 연호 융희 2년과 일본 연호 명치41년은 1908년이고, 명치43년은 1910년이다.

거제인끼리 뭉치자

1910년 8월 거제어기조합장 신영위(거제 둔덕면 출신, 1910년 당시 70세) 등은 혼란한 어기조합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1911년 6월 총독부의 어업령 공포 직전 거제어기조합은 1910년 8월 19일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조합’(약칭 거제군어기모곽조합)이라고 명칭을 변경하고 1911년 11월 30일 거제군어업조합을 재창립한다.

그러다가 1914년 거제군이 통영군에 통합되자 명칭을 거제어업조합이라고 바뀐다. 하지만 1914년 3월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은 거제 동부면 학동, 외포면 외포, 하청면 칠천도 등지에서 큰들그물(대부망)과 줄 어살(줄전:乼箭)을 소유하고 있었다. 3개 어장의 면허장에는 소유자가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에서 거제군어업조합으로 정정되었다. 따라서 1914년 3월 이전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 또는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조합이 혼용되었다. 일제는 1911년 어업령 공포 직후 기존 모든 어업조합을 해산시키고 재등록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명칭들이 다양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모체 어기·모곽전 조합은 거제와 통영에서 여러 조합으로 분화되었다. 통영은 1915년 이전 통영군 어업조합→한산어업조합(1914. 10. 5)으로, 거제는 거제군어업조합→거제어업조합이 한 갈래이고, 가조도는 창호리어업조합(1917. 4. 9)으로 각각 분열하고 있었다.

특히 가조도는 진남군 가조면에서 용남군 용남면 창호리→1914년 통영군 용남면 창호리→1929년 2월 통영군 사등면 창호리로 행정관할권을 변경했다. 이 섬은 거제 사등과 인접했으나 황금 어장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통영에 복속되어 있었다. 결국 중요한 어장이 밀집된 거제와 진해만 일대는 중앙정부든, 지방행정부든, 지주나 자본가와 모리배까지 모두 탐내는 곳이었다.

그래서 거제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우리 조선인 손으로’라는 구호 아래 일본인 어민들을 배제하고 거제어업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에게 일본식 어업기술뿐만 아니라 어선, 각종 어업도구까지 배우거나 구입하도록 강요했다.

1938년 10월 7일 양운어업조합의 합병결의를 위한 마지막 총대회 기념. 양운어업조합은 이운·일운면 조선인 어업단체였다.

타자화된 거제바다

거제 사람들은 내 바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제에 모든 걸 빼앗겼다. 다만 어업제도, 구역, 고기잡이 기술과 어선, 조합이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냈으나 여전히 ‘일본인 중심’의 조선총독부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거제어업조합 조합원들은 매년 군청이나 도청에서 어업면허 허가를 받고 값비싼 일본식 어선으로 개조해야 하는데 그 개조 비용은 비싼 일본인 대부업체나 금융조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간혹 어업조합이 조합원들에게 값싼 대부나 지원 등을 했다. 하지만 어민들에겐 예산상에서 턱없이 부족했다.

내 바다라고 허가 받고 고기잡이에 나서지만 풍부한 어장을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가까운 연안에서 작은 무동력선을 타고 얼마나 많은 어획량이 나오겠는가. 또 관청은 조선인에게 어업면허 기간을 1년 이상을 거의 주지 않았고 허가 결정도 1년 이상 질질 끌면서 불이익만 안겨 줬다.

이처럼 거제 사람들은 ‘내 바다라고 생각했지만 내 바다가 아닌 남(일본인)의 바다로 바뀌어 버린’ 거제 바다의 타자화(他者化)를 목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가난한 어업 노동자들은 면허 하나 받지 못하고 일본인 어장 밑에서 적은 임금과 폭력·차별대우 등을 겪어야 했다.

재산이 있는 조선인은 1년이든 반이든 면허 받아 가까운 바다에서 고기잡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거제사람들은 고기잡이 도구 구입비 혹은 대여비, 어선, 각종 물품 구입비, 생선 판매까지 적지 않은 자금을 가져야 가능했다.

해방이후 거제도인민위원회나 어민조합이 대부분 어민들에게 일본인의 어업도구와 어선, 어선을 무상분배했다. 근데 부일협력한 조선인들이 반발하면서 미군정을 등에 업고 자치기구를 와해시키고 분배된 모든 것을 다시 폭력적으로 압수했다.

그 바탕에서 국책회사가 설립되었지만 일부 회사 직원들의 공금횡령과 이권다툼으로 회사의 공중분해로 이어졌다. 결국 한국전쟁 시기 어장 문제를 놓고 서로 싸우다가 보복학살이 벌어지는 악순환을 겪었다. 나라의 혼란과 전쟁이라는 틈바구니에서 사리사욕에 벗어나지 못한 몇몇 인사들은 어장 분쟁에 큰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장승포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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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기 2016-09-29 11:17:17
전기자님 좌편향적 사고를 소지함은 좋으나 역사를 오도하심 안되죠 선대 어른으로부터 구전도 역사임을 인민위원회의 분배와 군정을 업고 갈취한 근거를 제시하세요 역사는 역사요 그 시대상항을 기자님 사상적 사고에 부합되게 오도하지말길....

개똥이 2015-05-31 14:15:34
거제도 인민위원회가 일본인들릐 어업수단들을 무상분배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있나요? 어장도면이라던지 분배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라던지.. 자료가 있으면 답글에 자료가 있는 사이트를 알려주세요. 분배이후에 진행된 사실들이 중요한 사료들이라서 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