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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聖君)과 혼군(昏君)의 차이
성군(聖君)과 혼군(昏君)의 차이
  • 거제뉴스광장
  • 승인 2015.10.2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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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강준흠: “지난번에 일에 따라 진언(進言)하라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신은 지식이 미치지 못하여 제대로 보필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크게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다. 며칠 전 이경신이 올린 상소는 하나의 변괴였습니다. 그는 먼 지역의 하찮은 자인데 조정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었으니 그 죄를 따지면 귀양을 보내더라도 지나친 처벌은 아니겠지만, 또한 깊이 나무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엄정한 처분에 신은 참으로 감복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조 판서에게 내린 비지 가운데 ‘닭이 울고[鳴] 개가 짖는[吠] 것 같은 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명폐(鳴吠)란 금수를 두고 하는 말이니 삼가 왕언(王言)의 체통을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이것은 자구(字句) 사이의 일에 불과하지만 실로 눈에 거슬립니다. 매우 황송합니다만 그런 생각이 들어 감히 아룁니다.”

서용보: “옥당이 아뢴 내용이 참으로 좋습니다. 신도 한 번 아뢰려고 했으나 미처 아뢰지 못했습니다. 숙종 임금께서 대간에게 내린 비지에 ‘인면수심’이란 말을 썼는데 당시 대신(臺臣)과 옥당, 승지가 연달아 아뢰어서 결국 그 말을 취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깊이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로 그 두 글자는 금수에게나 사용하는 말이니 비록 그런 글자가 아니라도 분명 달리 적합한 문자가 있을 것입니다.”

순조: “그 말이 좋다. 응당 고쳐 쓰겠다.”

[원문]

浚欽曰: “向來以隨事進言旣承下敎, 而顧臣知識不到, 不能仰裨, 一殷憂歎處也. 日前李敬臣之疏, 卽一變怪. 渠以遐土微末, 乃有輕朝廷之意, 以其罪則雖竄配亦非過矣, 而亦不足深責, 處分之嚴正, 臣固欽仰之不暇. 然戶判批旨中, 有曰‘鳴吠之類’, 鳴吠者, 禽獸之謂也, 竊恐有損於王言之體. 此不過字句間事, 而實涉礙眼. 極知惶悚, 而旣有區區之見敢達矣.”

龍輔曰: “玉堂所奏果好矣. 臣亦欲一番仰奏而未果矣. 肅廟朝臺諫批旨有曰‘人面獸心’, 其時臺臣ㆍ玉堂ㆍ承旨相繼覆奏, 終至反汗, 此政今日所當仰體者也. 大抵此二字, 卽用之於禽獸者, 雖非此字, 必有他穩合之文字矣.”

予曰: “其言好矣. 從當改下矣.”
 
-『일성록』 순조 3년 10월 27일

[해설]

이경신(李敬臣)은 북관(北關) 사람인데, 순조 초기에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문관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 판서에게 인사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대간(臺諫)의 후보에서 영구히 삭제되었다. 그러자 앙심을 품고 이조 판서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몹시 허무맹랑하였다. 조정에서는 이경신을 귀양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순조는 하찮은 자의 말에 심각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시골로 추방하는 선에서 가볍게 처벌하였다.

하지만 비판을 받은 당사자로서는 개인의 명예가 손상되고 자신이 행한 업무의 공정성까지 의심받을 수 있다. 또한,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말이 나온 것만으로도 조정에 수치를 끼쳤다고 여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진다는 요지의 인책(引責) 상소를 올리고 일단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는 것이 조선 시대 벼슬아치들의 일반적 처신이다.

인책 상소가 올라오면 임금은 사안에 따라 그의 처지를 배려하고 뜻을 존중하여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쉬게 하기도 하고, 본인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다시 조정에 나와 업무를 보도록 권면하기도 한다.

처음 이경신의 인사 청탁을 받았던 이조 판서는 그 이후 자리가 바뀌어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이경신의 상소가 올라오자 인책하며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 순조가 판서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으며 이경신의 말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으니 개의치 말고 공무를 수행하라고 달래면서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라는 표현을 썼다.

이에 대해 홍문관 부교리 강준흠(姜浚欽)이 그것은 임금의 말로 걸맞지 않은 표현이라 지적했고, 좌의정 서용보(徐龍輔)는 옛날 일을 들추며 강준흠의 지적에 힘을 실어 주었으며, 순조는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 표현을 고쳤다. 그리하여 지금 전하는 사료에는 해당 부분의 표현이 ‘해악(駭愕)’(『일성록』과 『승정원일기』), 혹은 ‘해패(駭悖)’(『순조실록』)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단어 하나를 바꾼 사소한 일이지만 조선 시대 임금과 신하 간 소통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일화인 듯하여 소개했다.

조선 시대에는 신하가 임금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게 하는 수단, 그것을 언로(言路)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언로를 국가의 혈맥(血脈), 곧 핏줄이라고 했다. 사람의 몸에 핏줄이 막히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듯이 언로가 막히면 나라는 나라다울 수 없고 사람은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다고 여겼다.

사료를 읽다 보면 임금의 잘못에 대해 신하가 거침없이 비판하는 데에 놀랄 때가 있다. 언론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된 오늘날에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강도로 신하들의 비판은 신랄하고 거리낌도 없었다. 사료를 자주 접하지 않는 분들은 절대 군주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도 처벌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물론 말 때문에 벼슬에서 쫓겨나고 심하게는 목숨을 잃고 멸문(滅門)의 화(禍)를 당한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심한 말을 하고도 무사했다. 전자는 언로가 막힌 것이고 후자는 언로가 활짝 열린 상태이다.

훌륭한 치적을 남긴 임금일수록 비판을 너그럽게 수용하고 말하는 신하를 처벌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가 폭군 혹은 혼군(昏君)으로 기억하는 임금의 시대에는 유난히 말 때문에 호된 곤욕을 치른 신하가 많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 : 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 번역위원
주요 번역서
- 정조대 『일성록』 번역 참여
- 『고문비략(顧問備略) 』, 사람의무늬, 2014

 

 

-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허가를 얻어 <거제뉴스광장>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  ‘고전산문’ 코너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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