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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역사책'은 없다
'올바른 역사책'은 없다
  • 거제뉴스광장
  • 승인 2015.10.2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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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소위 역사가라는 자들은 모두 돈이나 받고 쌀이나 요구하며 위세와 친분에 좌우될 뿐이다. 간혹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더라도 몇이나 되겠는가. 몰래 고쳐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그 선악과 시비, 치란의 진실을 어떻게 찾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다. 역사책을 읽는 사람이 옛일을 살피고 널리 보는 자료로 삼는다면 괜찮지만,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원문] 

所謂史者, 皆受金求米, 威勢顔情之所使耳. 雖間有不許者, 能有幾人? 而竊改者竄定者, 又不知其幾多, 則其善惡是非治亂, 何由而得其實乎? 余故曰讀史者, 苟以備故事資博覽則可也, 謂之皆實則未也.
 
- 윤기(尹愭, 1741~1826), 『무명자집(無名子集)』 책12 「정상한화(井上閒話)」, 「역사책을 만드는 법[作史之法]」

[해설] 

『사기(史記)』를 편찬한 사마천(司馬遷)은 역사가의 모범으로 추앙받지만, 비판도 없지 않다. 반표(班彪)는 사마천이 도(道)를 손상시켰다고 하였으며, 반고(班固)는 사마천이 성인의 뜻을 왜곡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반고 역시 『한서(漢書)』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사람을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을 부정하였다는 비난도 받았다. 중국 역사책의 전범인 『사기』와 『한서』가 이 지경이니, 다른 책은 말할 것도 없다.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한 진수(陳壽)는 정의(丁儀)의 아들에게 전(傳)을 써 주는 댓가로 수백 섬의 쌀을 요구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결국 집필하지 않았다. 『위서(魏書)』를 편찬한 위수(魏收)는 자신을 도와준 양휴(陽休)에게 보답하기 위해 전을 지어 주었으며, 이주영(爾朱榮)의 아들에게 뇌물을 받고는 이주영의 악행은 빼고 선행만 기록하였다. 결국 『위서』는 ‘더러운 역사책[穢史]’이라는 오명을 피하지 못했다.

한유(韓愈)는 『순종실록(順宗實錄)』을 편찬하면서 절친한 환관 구문진(俱文珍)의 악행을 덮어주었다. 그 밖의 내용도 사람들이 제멋대로 고치는 바람에 온전한 글이 없을 지경이었다. 『고조실록(高祖實錄)』을 편찬한 후주(後周)의 가위(賈緯)는 평소 자신을 박대한 재상 상유한(桑維翰)에게 앙심을 품고, 그가 백금(白金) 8천 덩이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부정축재하였다고 거짓으로 기록하였다. 이상은 모두 19세기 조선의 문인 윤기가 열거한 곡필(曲筆)의 사례이다.

윤기는 자신의 경험도 털어놓았다. 『정조실록(正祖實錄)』을 편찬할 때, 편찬을 담당한 관원들이 사초(史草)를 마구 고쳐 세도가에게는 칭찬과 아부를 일삼고 한미한 이들은 누락하거나 소략하게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소위 역사가라는 자들의 이러한 행태를 목도하였으니, ‘모든 역사가는 돈이나 받고 쌀이나 요구하며 위세와 친분에 좌우된다.’는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윤기가 언급한 역사책은 모두 국가의 감독 하에 편찬된 정사(正史), 즉 ‘올바른 역사’이다. 국가가 편찬한 역사책을 ‘올바른 역사’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본래 역사의 편찬은 국가의 할 일이다. 역사를 편찬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이 국가이다. 국가는 인력과 비용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반면, 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고 장기간 집필에 몰두하는 일도 개인의 힘으로는 무리이다.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누구보다 공정하고 정확하게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것이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가 편찬한 역사책은 아무래도 권력을 잡은 쪽의 입장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역사의 진실이 체재의 정통성을 위협하거나 권력자의 치부를 드러낸다면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윤기가 언급한 것처럼 편찬을 맡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견해와 감정이 개입할 우려도 없지 않다. 이러한 정사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야사(野史)이다.

『한서』「예문지(藝文志)」에 ‘예실구야(禮失求野)’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예법이 사라지면 재야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법은 상류층의 생활양식이다. 세월이 흐르면 예법도 바뀌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민간에서 그 예법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은 역사책에도 적용된다. 국가가 편찬한 정사가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개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야사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 시대 역사책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편찬한 정사이고,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一然)이 혼자 힘으로 편찬한 야사이다. 정확성과 신빙성은 『삼국사기』가 높지만,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신화와 설화가 가득하다.

고려 시대 역사책도 정사와 야사가 공존한다. 조선 초기 집현전 학사들이 모여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정사라면,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은 야사이다.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조선왕조실록』은 정사이다. 조선 시대 야사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지금 우리 고전으로 사랑받고 있는 책 중 상당수가 야사에 해당한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수많은 야사를 엮어 거질의 책으로 편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대동야승(大東野乘)』, 『대동패림(大東稗林)』,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 등 수백 권에 달하는 야사 총서가 바로 그것이다.

정사는 지난 역사에 대한 국가의 공식 입장이며, 야사는 정사의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을 보충한다. 온전한 역사 이해를 위해서는 국사와 야사의 공존이 필수적이다. 정사가 없다면 우리는 지난 역사를 일관적인 관점에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것이며, 야사가 없다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진실로 믿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야사가 없다면 우리는 단군 신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사육신의 존재는 잊혀졌을 것이며, 기묘사화가 일어난 원인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은 묻히고 말았을 것이며,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정사와 야사가 공존하는 덕택에 우리는 지난 역사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국사와 야사는 모두 장단점이 있다. 어느 한 쪽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역사책의 내용을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윤기의 주장은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의 역사책을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올바른 역사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역사책은 부정확하고 편향적이다. 올바른 역사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부정확하고 편향적인 역사책들이 모여 만드는 것이다.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주요 저역서

- 『일일공부』, 민음사, 2014
-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 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단독)
- 『정조어찰첩』, 성균관대 출판부, 2009(공역)
- 『소문사설 - 조선의 실용지식 연구노트』, 휴머니스트, 2011(공역)
- 『승정원일기』(공역), 『월정집』(공역) 등 번역

 

 

-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허가를 얻어 <거제뉴스광장>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  ‘고전산문’ 코너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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