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4-03-28 15:58 (목)
제자리를 지키는 미덕
제자리를 지키는 미덕
  • 거제뉴스광장
  • 승인 2015.11.04 23: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번역문] 

우리 조선은 처음 건국하여 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유학자가 배출되고 문화와 교육이 융성하였다. 이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도리가 해나 별처럼 분명해졌으며, 성인들이 서로 계승하여 어진 정치는 깊이가 있고 끼친 은택은 두터웠다.

이런 어진 정치와 두터운 은택으로 인심을 결집하게 된 것은 참으로 우리 한반도가 존재한 이래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기회라 하겠다. 안으로는 정권을 장악한 권신이 없고 밖으로는 함부로 날뛰는 강한 번국(藩國)이 없었으니, 결코 뽑히지 않을 기반과 범하기 어려운 형세는 억만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백성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심이 오랜 평안에 오만해져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어지고, 선비의 버릇이 문장의 폐해에 빠져 혼후한 기풍이 적어졌단 말인가. 처음에는 피차 뜻이 달라 그저 논의를 세우다가 끝내 이기려는 사욕 때문에 점점 사이가 벌어져서 물이 더욱 깊어지듯 거듭 고질이 되어 구제할 수도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으니, 통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원문] 

我朝肇創宏基, 以禮爲國, 儒先輩出, 文敎蔚興. 君君臣臣父父子子之倫, 皎如日星, 而列聖相承, 仁深澤厚. 其所以結於人心者, 固蓋有東方以來千一之會也. 內無執命之權臣, 外無跋扈之强藩, 其不拔之基·難犯之勢, 雖億萬年, 永保民可也.
奈之何人心狃於久安而無經遠之慮, 士習溺於文弊而少渾厚之風? 始以彼此之異意, 閒立議論, 終以務勝之私心, 轉成嫌隙, 如水益深, 反覆沈痼, 馴致至於不可救, 可勝痛哉!

- 권구(權榘, 1672~1749), 『병곡집(屛谷集)』제6권,「당론(黨論)」

[해설] 

병곡(屛谷) 권구(權榘)는 정치에 몸담지 않은 학자이다. 순수한 학자의 눈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발생한 붕당정치가 망국의 원인이 된 핵심을 꿰뚫어본 글이 바로 「당론」이다.

이 글에서 권구는 붕당정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선조(宣祖) 때 동인과 서인의 견해 차이에서 시작된 당론은 정치가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누구도 국가에 화를 끼칠 마음으로 당을 세우고 논의를 주장하여 서로 공격했던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 당시에도 지금도 모두가 당론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권구는 이 글에서 견해를 달리하는 당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일종의 독사 같은 무리와 경박하고 조급한 부류가 목전의 은원(恩怨)에 매달려 당론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결국 당론이 나라를 그르쳤다는 오명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독사 같은 무리니 경박하고 조급한 부류니 하는 치들은 모두가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의 결점을 끄집어내고 조작하고 결국 물고 뜯는 지경으로 몰아가다 보니 정작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은 온데간데없다.

본래 조선을 건국할 당시의 유학은 억만년 탄탄한 기반을 이룰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그 바탕의 핵심이 바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것[君君臣臣 父父子子]’이다.

대단하고 고매한 이론이 아니라 그저 사람 하나하나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억만년 탄탄한 기반을 이루는 유학의 초심인 것이다. 사람이 이 초심으로 돌아갔을 때 치열한 당론도 나라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경제 성장을 목표로 두었던 시대에도 희생을 감당하는 세대는 있었다. 경제적 성장을 위해 굶주림을 견딘 세대가 있었듯 이제 문화적 성장의 과도기에서 정신적 아픔을 겪는 것은 다만 과정일 뿐이다.

방황하고 흔들리고 아파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기성세대는 그들을 탓하거나 한심해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대가 한때 갈팡질팡할지언정 안정된 문화를 이루기 위해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픔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제는 이를 위해 정치가는 정치가의 자리에서, 교육자는 교육자의 자리에서, 집안의 어른은 집안에서 바른 길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부득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는 일이 있었고 이것이 다반사가 되었지만 이제 미래를 위해 통렬히 바른길을 고집해야 한다.

『맹자』에 창업수통(創業垂統)이라는 말이 나온다. 수통이란 좋은 전통을 후세에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지금 당장 혼란스럽고 어려워도 먼 훗날의 탄탄한 반석을 위해 선을 행하고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권구가 말하는 유학의 초심인 ‘군군신신 부부자자’의 의미이며, 지금 기성세대가 흔들리는 젊은이들을 위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 : 선종순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전주분원 전문위원
주요 역서
- 『심리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조선왕조실록 번역 및 재번역 사업 참여 
- 『국역 기언』 제2책,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종묘의궤』,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사가집』 제13책, 한국고전번역원, 2009 외 다수

  •  

-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허가를 얻어 <거제뉴스광장>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  ‘고전산문’ 코너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