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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메워 평지 만들고 물고기 씨 말려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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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화 시민기자
  • 승인 2016.01.0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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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이학규의 '기사시(記事詩)'에 담긴 백성의 고통

기사시(紀事詩)는 어떤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시(詩)를 일컫는 말이다.

거제도의 이행(李荇 1478~1534)과 김해∙거제의 이학규(李學逵 1770~1835) 선생은 기사시(紀事詩)에서  당시 흉년이 들거나, 혹은 관리들의 착취로 인한 민중의 어려웠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국토의 최남단에 버려지고 가문의 몰락과 자신의 참혹한 시련을 겪으면서 절망적인 처지를 극복하려는 여러 가지 의지를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유배문인은 생(生)을 끝까지 부여잡기 위해 하루라도 시(詩)를 적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사대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나마 마음속에서라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찰과 순명(順命)' 그리고 '진실의 발견'의 과정이 이어졌다.

용재 이행(李荇,1478~1534년)은 연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길에 올라 2여 년 동안 충주와 함안 배소를 거쳐 29세이던 1506년 2월에야 거제시 상문동 고절령(高節嶺, 고자산치) 기슭 아래에 도착하여 그 해 9월초 중종반정이 일어나 9월9일 방면될 때까지 약 7개월간 거제시 상문동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선생은 자신의 환경이 바뀔 때마다 시집(詩集) 외에 삶의 기록을 한 권의 시고로 엮었다. 남달리 현실사회의 비리와 비행 때문에 고심했던 시인이었다.

유배자의 노비신분에서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각양의 인생을 체험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의 인생역정은 '죽음의식'과 '현실인식' '애민의식'이 근간을 이루는 화두이자, 철학이었다.

또한 선생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학인(文學人)의 한 사람으로, 그의 시문집은 관각 문학의 전형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그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웠지만 그 형식만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깊은 의격(意格)을 체현(體現), 혼연히 일가(一家)를 이루어 조선조 굴지(屈指)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조선중기 주세붕은 [용재선생행장]에서 이행의 시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그의 시문은 사실을 근거로 곧바로 써 내려간 것이다. 꾸밈이 없고, 괴이하고 험절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연스러움은 신이 만든 듯하여 다듬은 흔적이 없다. 인간의 정감을 더하고, 사물의 이치에 해박하여 그 신묘함이 뛰어났는데 생각이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

귀양살이 체험을 통해 양반으로서 상류계층의 특권의식을 내려놓고, 현실세계에 바탕을 둔, 백성에 대한 애민(愛民)의식이 남달리 투철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그의 시편 속에는 서정적 자아가 관찰자 입장에 서기도 하고 직접 자신을 대비해 깊숙이 관여하기도 한다.

’구름‘ ‘벽 사이 벌레’ '매미‘ ’망아지‘ ’작은 말‘ ’시냇물‘ 등 자연 경물에 자신의 정감을 담아내 유배지에서의 자아를 표출한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에서 선생의 상황변화에 따른 인간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아래 시편에서 1506년 거제도 당시의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선생이 기거하는 집은 거제시 상문동 삼룡초등학교 옆 하천 동쪽 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윗 채엔 늙은 주인할미가, 아래채엔 선생과 몸종이 함께 살았다.

선생은 몸종과 함께 삼거리 구천동 계곡으로 놀려 간 적이 있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넘어 간 고개 이름을 '망현(莽峴)'이라 지었는데, 주인 할미가 워낙 수풀이 우거지고 푸서리가 많아 고개 넘기가 힘들다고 하여 선생이 지은 이름이었다("푸서리 쭉띠기가 쌔삐린 고개").

여하튼 선생은 남달리 현실 사회의 비리와 비행 때문에 고심했던 시인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 태도는 백성들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있는, '애민의식'이 현실인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요소이다.

1) <기사(記事)> 1506년 거제배소(配所) 유배 생활 중에 / 이행(李荇 1478~1534)    

당시 유민의 정황을 가늠케 하는 <雨>라는 제목의 시구에선, "씁쓸히 웃으며 지팡이 짚고 문을 나서니, 창망한 들판엔 밭갈이 한 곳이 없네" 라 하였다.

당시 남쪽 지방 전체가 흉년이 들었고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거제도 유배지에서 참담한 정경에 '기사(記事)'라 제목을 달아 사실 그대로임을 알리고자 다음과 같이 썼다.     

石田賦重歲又荒 따비밭에 과중한 세금 해마저 흉년이라 
去冬癘疫連死殤 지난겨울엔 돌림병으로 사람들 죽어 갔지 
數間茆屋風雨僵 몇 칸의 작은 띳집은 비바람에 쓰러지고 
倂日饘粥煎飢腸 날을 걸러 죽 먹자니 주린 창자가 타는 듯 
四隣散盡親戚亡 이웃들 다 흩어지고 친척들도 도망쳤는데 
一身徭役安可當 한 몸으로 그들의 부역을 어이 감당하리요 
朝來惡使眞豺狼 아침에 온 못된 아전놈 참으로 이리 같아 
徵索更到毫與芒 지푸라기 하나 안 남기고 샅샅이 뒤지더니 
室中罄懸無留藏 집안이 텅텅 비어 낱알이라곤 하나 없자 
牽牛負鼎如探湯 소를 끌고 솥을 지고 가도 손댈 수 없어라 
主嫗氣奪空在傍 주인 할미 기가 막혀 속절없이 곁에 서서 
拊膺籲天聲何長 가슴 치며 하늘 부르는 소리 어찌나 슬픈지 
莫拊膺恐汝傷 가슴을 치지 마오 그대 몸 상하겠소 
莫籲天天茫茫 하늘을 부르지 마소 하늘은 아득하다오. 

2) <비온 뒤(雨後)> 이행(李荇 1478~1534) 

당시 흉년이 든 거제도에서 그의 애민 의식은 남달리 투철하여, 백성들의 절박한 상황을 가감 없이 몇 편의 시(詩)에다 담아낸다.

1506년 어느 날 때맞춰 내린 비에도 고현천(大川)에 굶어죽은 시체가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이행은 그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밟히지 않은 채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서도 충분히, 당시 현실세계에서의 비리를 시(詩)속에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유배 체험을 바탕으로 감상적 시작 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에 뿌리를 둔 시재(詩材)를 취하여 자기 목소리로 노래한 것이 후대에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上帝重民稼 상제께서 백성 농사를 중시하여
雨澤勤及時 때맞추어 비의 은택 내려 주시누나 
高田水沒踵 높은 곳 논은 물이 발꿈치 잠그고 
下田水瀰瀰 낮은 곳 논은 물이 철철 넘치도다. 
嗟哉彼蒼生 그런데도 아아 저 백성들은 
胡不事耕菑 어이하여 논밭을 갈지 않느뇨. 
溝中有餓死 도랑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莫怨天公爲 아무도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네.

3) <가뭄(旱)> 이행(李荇 1478~1534) 

春雨勸穡事 봄비 내려 농사 권면할 적엔 
良田多自棄 좋은 논밭 많이들 버려두더니 
夏月繼以旱 여름에는 가뭄으로 이어지니 
此豈非天意 이 어이 하늘의 뜻이 아니리요 
請天更小念 하늘이여~ 다시 조금 유념해 주오 
恐民無孑遺 백성이 죄다 죽을까 걱정이라오 
民若無孑遺 백성들이 만약 죄다 죽는다면 
天亦有何利 하늘인들 무슨 이득이 있으리요 

참혹한 형벌과 유배 생활이 이어지는 속에서도 그는 한마디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은 채, 책 읽기를 쉬지 않으면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하였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입만 성한 사대부와 자신의 안일만을 앞세운 장수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시편들을 보면서 선생의 현실인식 태도는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백성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행의 시는 현실파악의 문학으로써 리얼리즘 경향을 띠고 있음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4) <최조행[催租行]> 세금 독촉 / 이학규(李學逵 1770~1835)

낙하생이 김해와 거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19세기 전반에는 중세적 역사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농촌 사회에서 농민분화 현상이 급격히 진행 되었던 바, 이는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토지 상품화의 촉진 등으로 토지가 일부의 지주층 및 부농층에게 집중되었으며, 그 결과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이 급격히 증가해가고 따라서 일부의 농민이 부농(富農) 상호(上戶)로 상승하는 반면 대부분의 농민들은 하호(下戶) 빈호(貧戶)로 전략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농촌사회의 실상은 예컨대, 다음 기록 ‘부지들은 넓은 땅을 차지하고 빈민들은 종같이 부리면서 일하지 않고 호사스럽게 살지만 빈민들은 땅 한 치 없이 부자들의 땅을 빌려 힘껏 농사지어도 겨우 소출의 절반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그렇지도 못하면 농사일에 품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품팔이조차 얻지 못하면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닌다.’에서 보여주듯,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점차 빈한한 민중 계층이 증가되고 있었고 따라서 다수의 민중은 고난에 찬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왕조의 정치체제가 이러한 시대적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는데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보수세력의 세도정치가 등장하여 더욱 관정(官政)의 기강이 무너지고 그에 따라 무능한 관원과 이들의 부패가 심해지자 민중들의 고난은 더욱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때에 이와 같은 역사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작가는 당시의 민중들이 겪는 고통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 어린 동포의식과 그러한 시대를 가슴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三月上平菑 3월이라 윗 묵밭에는
天鸙雲中飛 종달새 구름 중으로 날아오른다.
舊穀已垂盡 묵은 곡식 이미 떨어졌는데도
況是催租時 더구나 세금마저 독촉하네.
去秋歲不稔 지난 가을엔 흉년이 들었는데
稅斂無乃悲 세금을 거둔다니 슬프지 않으랴.
府帖急如火 관청의 고지서 독촉함이 불같고
沿門索家貲 문마다 내달아 값나갈 것 뒤지네.
富家有餘粟 부잣집에선 곡식이 남아돌고
精鑿自爨炊 깨끗하게 쓿은 쌀로 밥을 짓는데
貧家賣錡鍑 가난한 집은 가마솥마저 팔아도
甔石動欠虧 쌀독은 걸핏하면 비어 있다네.
舸峨萬斛船 높다랗게 만 가마나 실은 큰 배는
轉漕出南磯 남쪽 여울 벗어나 실어 나른다.
船頭暮伐鼓 뱃머리 저물녘엔 북을 울리며
陸續向京師 뭍으로 이어져 서울로 향하네.
夙昔厭見官 예전에는 관원보기 싫어하여
見官卽菙笞 관원 만나면 매 맞기 일쑤였네.
婦女遭囚絏 부녀자도 끌러가 갇혔으니
何以任調飢 어떻게 아침공복을 견디랴.
嬌兒未離抱 어린아인 품에서 떼놓을 나이 아니지만
忍自將鬻爲 그래도 장차 팔아야 한다네.
一身去無托 한 몸 맡길 곳이 없으니
汪然雙涕垂 두 눈에 눈물만 흘린다네.

빈한한 농가의 이른 봄은 이른바 춘궁기라해서 끼니를 때우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세금독촉은 성화같다. 지난 가을에는 흉년이 들었으니 세금을 감해 주어야 함이 마땅한데도 법을 무시하고 관청에서는 그대로 거두려 한다. 그리하여 고지서를 보내어 불같이 급하게 독촉하고, 내쳐 이문저문 내달아 열고 다니면서 재물을 수색하기까지 한다. 이 시의 첫 부분은, 이상과 같이 관아의 부당한 처사와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시의 중간부분은 부농과 빈농의 대조에 이어 백성의 굶주림은 아랑곳없이 세금을 거두어 중앙으로 실어 나르기만 급급한 당시의 실정(失政)을 폭로하고 있다.

시의 끝부분에는 관원의 횡포와, 그 아래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더욱 중점적으로 묘사하여, 작가의 창작 의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세금을 못내어 관청에 끌러가 갇히어 매를 맞고 결국 어린자식까지도 먹여 살릴 수 없어 팔아야하는 농민의 비참한 실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5) <치어탄[鯔魚歎]> 숭어잡이 어민의 탄식 / 이학규(李學逵)

鯔魚一丈力可提 한 발이나 되는 숭어 들기도 힘드는데
賣魚得錢還買犁 생선 판 돈으로 농기구사서 돌아가네.
歸時一醉復容易 돌아갈 땐 거나하게 취하니
乘興春風九里堤 흥에 겨운 춘풍에 제방둑이 다사롭다.
南官供億誰盡說 남쪽지방 관원대접 말로 다할 수 있으랴
持叉入湖寧拗折 작살을 꺾어 호수에 던져버려야지
北人重魚不重肉 북쪽 사람들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니
貴令作鱐包苴別 귀히 만든 어포를 포장하라 명하네
湖中三老暮招呼 마을의 삼노를 저물녘에 불러모아
坐搜百罝輸行廚 어망마다 거두어 관아주방에 실어간다.
安得湖陂萬柄鍬 어떻게 호수 언덕에 만 개의 가래 얻어서
上亘盆山下佛橋 분산으로부터 불교에 이르기까지
剗山湮湖作平地 산깎아 호수 메워 평지 만들어
逝令魚子絶其苗 물고기 씨를 말려 버리고
使我湖民但耕穮 우리 물가 백성들 김매기만 하리까.

숭어를 팔아 농기구를 사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술에 취하여 흥겨운 마음으로 제방둑을 걸어가고 있으니 겉으로만 보면 행복한 농민의 표정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물고기를 잡아 받치라는 관원들의 지나친 요구에 시달림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어잡이 어민의 탄식(鯔魚歎)’이라는 본 시(詩)의 끝부분은 더욱 절실한, 절규에 가까운 백성의 외침을 보여주고 있다. 물고기 공출에 견디다 못한 나머지 그 화근이 되는 호수를 아예 메워 고기의 씨를 말려 버리고 싶다 한다.

이곳 민중들은 농사지으면서 물고기도 잡아 바쳐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호수를 메워 평지를 만든다는 것과 물고기 씨를 말려 없애 버리겠다는 것은 모두 당시의 관리 등 지배계층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항거의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민중들이 지배계층으로부터 받는 수탈은 어민들에게도 한결같이 부여되는 질곡이었다.

6) 기민14장[飢民十四章] 굶주린 백성 / 이학규(李學逵)

기근을 견디지 못해 뿌리박고 살던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참혹한 정경이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목도한 작가는 그의 현실주의적인 작가의식에서 이를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아픔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진심으로 그들을 동정하였다. 그 반면에 그러한 모순된 시대현실을 비판하는 이상과 같은 장편고시 14장을 창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烈風不迷舜 순(舜)임금은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九日復警堯 아홉 번이나 앞서 요(堯)임금을 다시 깨우쳤다.
天雲鬱煙火 하늘의 구름에는 연기가 가득한데
金石同時焦 쇠와 돌도 동시에 불에 탔다는구나.
復聞湖嶺間 들리는 소문엔 충청도 경상도 사이에서
冰雹揚䬝飆 우박이 폭풍 속에서 흩날렸다는구나.
湖嶺京師本 충청도 경상도 서울에선 본디
失此民何聊 이런 백성이 떠나가니 어찌하리오.
嗟哉東郭子 가엾어라 빌어먹는 이들이
藿食方蕭條 콩잎을 먹으니 사방이 스산하도다.

焚尩不爲仁 불에 탄 절름발이 어질지 않다하고
走魃不爲祅 가뭄에 떠나가도 재앙이 아니라네.
廟謨不謀野 조정의 일은 민간을 위한 계책이 아니고
庚癸非所料 군량으로도 생각한 바가 아니다.
世祿自致身 대대로 녹봉을 받으며 나라에 신명을 바치는
氣勢承金貂 기세(氣勢)로 금초(金貂)를 이어가누나.
雀餳似甘露 작당(雀餳)은 감로(甘露)와 유사하고
鳳食不害苗 봉황도 어린 싹은 해치지 않는다네.
民災非今日 백성의 재앙은 오늘만이 아닌지라
衢路徒嘵嘵 네거리에선 아옹다옹 시끄럽구나.

種稻一斛強 종자벼는 한 섬이 더 되었는데
穫稻五秉餘 거둔 벼는 다섯 병 남짓
生死在田官 생사가 전관에게 달려 있으니
所願蠲吾廬 우리 집 세금 덜어주길 원할 뿐이네.
井稅且依舊 세금은 예전과 같으니
鷄黍計已疎 대접 소홀할 것 짐작해서인가
傭雇且未報 품삵도 아직 갚지 못했는데
何况爲冬儲 하물며 겨울 저장 할까보냐
飜思上坂田 생각하니 위 언덕 밭에
赤地空荒墟 붉은 땅으로 버려져 있다네.

이 시에서 굶주림의 대상이 되는 농민은 웬만큼 토지를 소유한 농민층이다. 따라서 이같이 자영 농민층이 굶주린다면 임차농이나 고용 노동자층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그런데 이때 굶주리게 된 주된 원인은 농사를 망쳐서가 아니라, 바로 과도한 조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관원 대접에 소홀한 까닭에 더욱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 것이라 했으니, 결국 농민은 관리들의 횡포에 더욱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禍首句龍祀 재앙의 원흉인 토지 신께 제사하는데
厲階倉頡文 창힐(倉頡)의 글자가 빌미가 되었다.
到今姧吏簿 지금에 이르러 관리의 장부를 조작하니
虛實不可聞 거짓과 참을 구별할 수가 없다.
未知上古時 아직도 상고(上古)의 시대를 모르니
亦有租稅云 조세(租稅) 또한 이와 같도다.
租稅苟不出 조세는 진실로 아껴야 하거늘
十口猶未分 열 식구로 가히 나누지 말아야한다.
但恨死無日 다만 하루도 빠짐없이 원한을 품고 죽는 사연엔
不恨徒辛勤 고된 일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官糴在冬秋 관곡은 가을과 겨울에 거두어들이니
轆轆車輸倉 수레소리 요란하게 실어 나르네.
官府有常平 관부에는 상평창이 있는데
姧細以低昂 간사한 무리들이 곡가를 조작한다.
州圖一万戶 고을의 호적에는 일만 호구인데
爾逋三万強 저들은 삼만냥도 더 축냈다네.
中庭椎肥牛 뜰 가운데 소도 때려 잡아놓고
呼盧間吹簧 도박판 벌리면서 풍류도 즐기구나.
十口且安坐 열 식구나 되는 가족도 편안히 살리니
那不化鼠狼 어찌 족제비 같은 자가 아니냐.

당시의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의 또 다른 원인은 위민농정(爲民農政)의 부재와 아울러 역시 앞에서 지적한 부패한 관리 지배층의 발호와 그들이 자행하는 횡포 때문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위에서 보면 곧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농간을 부려, 본래 구휼을 위하여 설치한 상평창의 곡가를 조작하고 그 틈을 이용하여 삼만 냥이나 포흠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소를 잡아먹으면서 도박판을 벌인 것이다.

결국 그들이 포흠한 많은 돈이나 방탕하게 소비하는 재물은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온갖 방법으로 착취한 것이다. 때문에 백성들은 이리저리 법망을 피하여 포악한 짓을 거침없이 저지르는 이들 아전들을 가리켜 간사한 족제비 같은 존재라고 비난하고 있다.

穀貴尙爲食 먹을 수 있는 곡식이 귀하니
穀竭無與謀 곡식이 없어 일을 꾀할 수 없네.
抱布已虛還 베를 가져와도 이미 텅 비워 돌아와야 하니
何况易衾裯 하물며 홑 이부자리야 더 무엇하랴.
豪家信餘粟 부잣집은 남은 오곡이 있는데
恐此低價求 아마도 이는 싼값에 구했겠지.
况聞湖南舶 때마침 호남에서 선박이 들어와
百艘依長洲 긴 물가에 수많은 선박이 늘어섰네.
潛糴夜出境 몰래 쌀사려 다른 지방으로 밤에 나가니
城中但坐憂 성(城) 가운데는 오직 근심만 남았네.

食薇苦腳腇 고사리 캐먹고 힘든 다리를 이끌어 
采葛至深根 깊이 박힌 칡뿌리를 파낸다네.
棄置與婦子 내버려 둔 처자(妻子)는 
生熟那復論 어찌 날것과 익은 것 따지랴만
來歸子城下 작은 성곽 아래로 돌아와
一睡安且溫 편안하고 따뜻이 한 잠을 청한다.
仰當白日照 마침 우러러 본 밝은 해가 비추고 
側聞車馬奔 분주한 수레와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데
呼之久不譍 아무리 불러도 오랫동안 응답이 없으니
謂我已亡魂 이미 죽은 혼(魂)이라고 알릴 수밖에.

靑靑陵中麥 짙푸른 언덕의 보리밭에
連根掇其茁 연이은 뿌리와 그 싹을 거두어 
䰞麥救眼歬 보리를 삶아 눈앞의 일을 구원하니
來日非所卹 내일을 걱정할 바가 아니네.
但尋地上葉 다만 땅 위의 이파리만 찾을 뿐,
不見天中日 하늘 가운데 태양을 보지 못하네.
烏鵲滿樛枝 휘늘어진 가지마다 까마귀와 까치가 가득하고
風聲暮蕭瑟 저문 날 바람소리 소슬하다.
誰能卽立死 바로 선 채로 누가 죽으랴만
飢飽永相失 굶주림과 배부름 영영 서로 어긋나네.

差科死卽已 세금부과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不死應遭笞 죽지 않으면 응당 매를 맞는다네.
賣屋尙行乞 집을 팔아서 걸식은 할 수 있으련만
鬻兒當依誰 자식까지 팔아서 누구에게 의탁하랴.
惟有婦子情 아내나 자식 간의 인정이 있기에
生死力相隨 죽든 살든 서로 힘껏 따를 뿐이지
一身去無托 한 몸을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하여
行坐且臨歧 가다 앉다 또 다시 갈림길에 다다랐네.
敎婦捻頭蝨 아내에게 머릿속 이를 잡게 하노라니
汪肰雙涕垂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곡식도 없고 옷도 없는 비참한 생활에 야반도주하여 떠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내팽겨 친 처자식은 고사리 칡뿌리 캐먹어도 굶주림에 죽어간다. 아직 덜 여문 보리밭에서 뿌리 채 뽑은 보리를 삶아 먹는데, 당장 배고픔에 내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이런 참혹한 백성들의 기근에도 세금을 내라고 독촉하니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넘길 수밖에 없다. 저절로 피눈물이 흐르다가, 마른 눈물에 통곡소리 또한 낼 수도 없는 비참한 생활상을 표현했다.

北門無衣子 북문지탄(北門之歎)에 옷 입은 자식이 없고
中夜有哀聲 한밤중에 슬픈 곡성만 있구나.
四體直且堅 사지(四肢)가 곧게 굳어지니
嗚呼知無生 오호라! 모든 게 무생(無生)임을 알아야 하거늘. 
但記城市面 다만 성(城)의 저잣거리 상황을 기록하노니
不識鄕里名 마을 이름은 알리지 못하겠네.
至死有不瞑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눈을 감지 못하는데
無乃懷至情 어찌 지극한 정(情)을 생각지 않으리.
纍纍㬺囊間 시체자루 사이마다 다락다락 올려진
一錢復誰爭 한 푼의 돈인들 누가 다투겠는가.

髮白未爲醜 흰머리가 추한 것은 아니지만
肉黃眞可悲 누렇게 뜬 살갗은 참으로 슬프구나.
氣短語莫續 가쁜 숨결에 말을 잇지 못하고
意速行不隨 급한 마음에 따라가지 못한다.
骨肉信可念 골육(骨肉)을 사랑해야 함에도 
且復提幼兒 다시 어린아이까지 버린다네.
城中五鼎粥 성(城) 안에는 다섯 개의 솥에 죽이 있는데도
施及苦久遲 괴롭게도 너무 오랫동안 더디게 베푼다.
久遲事固肰 지체한 일이 오래되어 당연한 듯이 
恐死無移時 잠시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奉盈莫放手 물죽을 바치니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
執熱當屢吹 뜨거우면 당연히 여러 번 불어 마셔야지.
但知顙有泚 다만 이마에 땀이 남을 알아야하거늘,
不覺涕垂頤 턱에 드리운 눈물도 깨닫지 못하네.
水穀稍下咽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면
枯腸鬱㗀咿 주린 창자에 흐느끼는 소리 울린다.
歸哉府南鳴 돌아오라! 고을 남쪽에다 외쳐도
草根萋已滋 풀뿌리 이미 자라 우거졌다네.
牛犁略盡賣 소로 밭을 갈려 해도 팔아 버렸으니
何事春耕爲 무엇으로 봄갈이를 하려나.

粲粲豪門子 영롱한 호걸의 문지기
朱顔粱肉腸 붉은 얼굴에 좋은 양식과 고기 잡수셨네. 
膳㜎雀頭衣 선물로도 과분한 다갈색 모자에
出入椒桂香 산초와 계수나무 향기 드나든다.
中堂煖爐會 어른의 집 난로회(煖爐會)에서
匙筯羣鏘鏘 여럿 숟가락 젓가락소리 쟁쟁 울리는데
持炙已色難 구운 고기 집으면 낯빛이 불편하여
啖鱐反吐剛 어포를 씹다가 딱딱해 뱉는구나.
脂膩不可想 기름때를 생각하지 마시라
苦待春蔬嘗 봄철 채소 맛이 몹시 기대된다네.
 
匪獸孰率壄 누가 가축을 들판에서 기르며
匪魚孰潛湖 누가 물고기를 호수에 감추랴.
人生懷父母 부모를 그리는 인생이나
旣長偕婦夫 이미 부부되어 함께 살아간다.
在家一身貴 내 집에서는 귀한 몸이나
去家一身孤 집 떠나면 이 한 몸 외롭더라.
日月被我面 세월은 내 얼굴에 미치고
水土榮我膚 풍토는 내 살갗에 성(盛)하네.
同是天之民 우리 모두가 하늘의 백성인데
予生胡爲乎 나는 어떤 이유로 태어났는가?

굶주림에 죽은 가는 백성이 너무 많아, 시체자루마다 올려 진 몇 푼의 돈을 아무도 건드리질 않는다. 관아에서 구휼한다고 5개의 솥에다 죽을 끓이는데도 성 밖에는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는 더디게도 더디다. 모두가 죽어가는 시신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탓이리라.

물죽이라도 먹고 살아난 사람도 이미 논밭에는 수풀만 왕성하고 봄갈이할 쟁기나 소 한 마리 없다. 부잣집 식탁엔, 난로회에서 고기 굽는 냄새 풍기고 어포가 여물다고 뱉는 소리 들린다. 화려한 다갈색 모자에 산초계수나무 향기 풍기고 신선한 봄채소 기다린다. 일반 백성은 죽어나도 권력층과 부잣집의 곳간은 빌 틈이 없는 19세기 초반의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주1] 동곽번간(東郭墦間) : 동쪽 성곽의 무덤 사이를 돌아다니며 얻어먹는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관직을 구걸하는 행위를 의미함.

[주2] 금초(金貂) : 금초는 황제의 좌우에서 시종하는 신하가 모자에 다는 장식으로 시종신을 뜻한다. 또는 한 나라 때 품계 높은 무관(武官)이 쓰던 관이다.

[주3] 감로(甘露) : 천하가 태평하면 하늘에서 좋은 징조로 내린다는 단맛이 나는 이슬. 작당(雀餳)과 목례(木醴)도 이와 유사한데 작당과 목례는 빛이 깨끗하고 향기로운 구슬처럼 생겼으나 좋은 징조가 아니다.

[주4] 구룡씨(句龍氏)와 기씨(棄氏) : 사(社) 즉 토지신(土地神)과 직(稷) 즉 곡식신(穀食神)을 가리킨다. 구룡은 공공씨(共工氏)의 아들 이름으로, 수토(水土)를 잘 다스려 뒤에 후토지신(后土之神)이 되었다고 하며, 기(棄)는 주(周)나라의 선조(先祖)로서 농관(農官)이었던 후직(后稷)의 이름으로, 뒤에 곡식을 주관하는 귀신이 되었다 한다.

[주5] 창힐(倉頡) :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帝王)인 황제(黃帝) 때의 좌사(左史).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서 처음으로 문자(文字)를 만들었다고 함.

[주6] 북문지탄(北門之歎) : 북문에서 한탄함이라는 뜻으로, 벼슬자리에 나가기는 했으나, 뜻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함.

[주7] 무생(無生) : [불교] 모든 사물과 현상이 공(空)이므로 생기고 사라짐의 변화란 있을 수 없음. 일체의 미로(迷路)에서 초월한 경지. 다시는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계(衆生界)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배울만한 법도가 없게 된 자리의 부처를 이르는 말.

[주8] 봉영(奉盈) : 그릇에 가득 찬 것을 받들고 있음.

[주9] 난로회(煖爐會) : 옛날에, 화롯불에 갖가지 음식을 지지거나 구워 먹던 모꼬지. 흔히 음력 시월 초하룻날에 함. 

 


고영화 선생은 1963년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에서 태어난 향토사학자이자 고전문학 전문가이다. 경북대학교를 졸업했고 고전문학, 특히 유배문학을 집대성하고 있으며 2014년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자신의 조사, 연구결과를 거제시에 기증해 <거제도유배고전문학총서>로 발간하게 했다.

다수 지역언론에 거제 고전문학과 향토사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강연과 출판 활동으로 거제 고전문학을 널리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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