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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권리' 주장 많아져야 거제 미래 밝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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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운 대표기자
  • 승인 2016.01.31 22: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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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떠나는 '우리들의 신부님', 배진구 신부의 회상
37년간의 성직자 생활 끝에 잠시 숨을 고르게 된 배진구 신부. 김민수 기자.

배진구. 만 65세. 작은 체구에 그리 말수도 많지 않은 그는 신부다. 그가 4년간 고현성당 주임신부 봉직을 마치고 안식년에 들어가 어머니가 계신 창원으로 돌아갔다.

심란한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을 달래고 하느님 나라를 설파한 종교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그는 거제의 많은 양심세력과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다가가 안기기도 하고 도움을 청하기도 한 너른 품이기도 했다.

그냥 보내 드리기가 못내 아쉬운 사람들의 요청으로 20일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22차 정기총회에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떠나는 사람은 몸담았던 환경운동연합 식구들을 위로하고, 남은 사람들은 그의 수고에 때늦은 고마움을 표했다. <거제뉴스광장>이 총회 시작을 앞두고 짬을 내달라고 졸라 만났다.

그가 환경운동연합 의장과 고현항매립반대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겐 '우리들의 신부님'이다. 앞으로 1년간 안식년을 보낼 예정인 '신부님'은 어떤 계획을 갖고 있을까?

"한 1년 정도는 좀 쉬어야지. 아픈 몸도 좀 추스리고...그러다 주교님이 또 어디 가라 하시면 곧장 가야지. 어디가 될 지 모르지만 4년 정도는 또 다른 본당에 가야 할 거야 아마."

목 디스크로 여러해 고생한 그는 우선 몸부터 추스리겠다고 이야기했다. 모처럼 어머니와 따뜻한 시간도 갖고 싶다 했다. 그런데, 은퇴가 아니다. 앞으로 4년은 더 본당 신부로 사목의 길이 남아있다 했다. 정년이 70세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는 1979년 신부가 된 이후 37년동안 목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늘 그의 발걸음은 성당의 울타리를 벗어나 '땅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성당 밖에는 노동자, 농민,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땅을 딛고 서 있었다. 그의 신부로서의 생활은 그들과 함께한 세월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신부가 되고 첫 해에 양덕성당 보좌로 갔어. 그때가 1980년인데, 한일합섬, 수출자유지역, 창원공단 등지 노동자들이 엄청 많았어. 당시는 물론 노조가 없을 땐데 그 일을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JOC)가 맡곤 했어. 내가 그 지오세 담당을 했거든. 당시 수출자유지역에 들어온 일본 기업을 위해 7년간은 노조를 설립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어. 그런데 그 7년이 다되어 가면서 노조설립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거지. 그러자 야반도주한 회사가 하나 둘 생겨났어.  내 기억으론 그런 회사가 한 해에 18개인가 그랬어. 결국 지오세가 노동자와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지"

종교가 권위에 매몰돼 있을 때 종교의 권위는 인간으로부터 외면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배 신부는 그 종교의 권위 대신 인간을 선택한 것일까. 

"노동자들은 갈 데가 없었어. 건물이며 기계는 다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었으니까. 밀린 월급이라도 받아서 한숨이라도 돌려야 하는데, 그런 막막함이 또 없었지. 종교가 뭐겠어. 땅에 발딛고 사는 사람들 고통을 외면하고 전통과 권위만으로 하느님 나라를 말할 수는 없잖아. 지오세 본부하고 힘을 합쳐 책도 만들고, 일본 정평(정의평화위원회)에도 보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당시 상황을 많이 알리는 거였지. 그 일로 노동자, 노동현실에 대해 눈을 떴다고 봐."

그가 거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4년전 고현성당 주임신부가 처음이 아니다. 1983년 옥포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1987년에 창원 반송성당으로 떠날 때까지  5년 가까이 거제의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만들어진 대우조선노동조합의 역사에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86년도에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 초대해서 대우조선 안에서 근로기준법, 노동법 강의한 적 있었어. 당시 그런 법이 있는지,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법인지 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었어."

옥포성당 지오세와 배진구 신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거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그와 함께 공부를 했다. 그해 겨울, 배신부는 직접 유인물을 들고 공장으로 나갔다.

"86년 11월인가 12월쯤일거야. 나는 대우를 맡고, 당시 거제성당 김영식 신부가 삼성을 맡아서 유인물을 들고 공장 문으로 나갔지. 노동3권 보장하라, 그런 내용이었어."

87년 7월 울산을 시작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자대투쟁이 전국을 휩쓸었다. 14번 국도는 봉쇄되고, 붉은 물감으로 갈겨쓴 황포가 대우조선 공장 문을 지키고 섰을 때, 거제에서는 안타까운 한 목숨이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됐다. 8월 22일,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지금의 롯데마트앞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하던 도중 이석규(당시 22세)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게 된다.

그 뒤로 89년 이상모, 박진석 등 열사들이 줄줄이 자기 목숨을 불속에 던졌다. 이들 5명 열사의 추모비는 지금 대우조선 공장 안에 서 있다.

배 신부는 "그 순백의 청년들이 내던진 목숨 값이 오늘의 민주노조"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노동자들과 함께 한 세월같다"고 회상했다. 

배 신부는 그 80년대 후반, 혼란스런 조국을 떠나 미국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김영식 신부 때문에 불똥이 튀었다"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89년 4월 김영식 신부가 미국 교포사목으로 가기로 돼 있었는데, 8월에 임수경이가 북한 청년축전엘 갔지.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에서 임수경이를 데리고 오면서 전국의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에게 출국금지가 떨어졌어. 결국 김 신부가 못가게 돼 내가 대신 갔다 왔지. 당시 미국 하면 얼마나 욕을 많이 하던 때야. 처음엔 안가겠다 하다가 미국 사회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도 앞으로 사목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어. 4년 10개월 있다 왔네."

세월이 흐르면서 사회는 노동문제 이외에도 곳곳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환경과 개발이라는 해묵은 논쟁에서 여전히 개발의 논리가 환경을 압도하고 있다. 그가 환경운동의 최전선에 다시 몸을 던진 것도 어찌 보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세태를 가엾게 여긴 탓은 아니었을까? 2년전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의장을 맡았다.

'좋은 말'이 아니라 때론 '고함'도 오고가는 싸움판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때론 바닷가에서, 때론 산속에서 '로만칼라'를 목에 두른 채 '뭇 생명에게 미안하다'는 현수막을 손에 들었다.

"환경운동연합 의장 제의 받았을 때 선뜻 수락한 이유가 있어. 함양성당에 있을 땐데 지곡이라는 곳에 리조트계획이 발표됐어. 말이 리조트지 골프장이었거든. 내가 골프장반대대책위원장 했어. 버스로 할머니들 모시고 국회의사당 3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 자연은 창조물이고 이를 지키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고, 그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지."

그는 이번 거제에서의 4년동안 '고현항매립반대운동'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한 일이 없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같이 일한 사람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은 그가 없었더라면 대책위가 굴러가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가 했어도 할 일이었다. 이기기도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당시 위원장 맡고 나서 어디 언론하고 인터뷰했는데, 그때 그랬다. 결과가 패배일 수 있다고. 정부에서 주관하는 일이 우리가 반대한다고 쉽게 바뀌겠느냐고. 그렇더라도 누군가가, 그나마 거제의 환경과 미래에 관심과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어."

신부인 그가 "싸움'이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 더욱이 질 수도 있는 싸움의 전면에 나섰다. 문득 싸운다고 모든 사람이 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존을 전제로 하되, 생각의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고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 그가 본 싸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시민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를 얻어내는 대신 대책위는 고현항재개발 사업에 동의했다. 

"작년 12월 31일 권 시장과 5개항 합의서에 사인하고 활동을 마무리했어. 항만재개발을 하되 이런 식으로 하자고 합의를 본 거야. 환경연합에서 보면 매립 자체 원천반대였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패한 거지."

그가 '패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각기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쉽사리 이 문제에 반대여론이 집중되지 못한 측면도 컸다. 그는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단식까지 했지만, 앞으로 과연 그 합의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까 하는 걱정이 있어. 지켜지지 않을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뾰족한 대책이 없고. 시민의 대표라는 시장이 서명한 거니 지킬거라 믿어야지. 안 그러면 또 새로운 싸움이 일어날 건데, 그걸 감당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봐."

그는 경남 고성이 고향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거제에서 맺어진 인연과 관여한 일 덕택에 거제는 또 하나의 고향이 됐다. 마치 거제의 수많은 사람들이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사는 것처럼. 그가 '고향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진 사람에 대한 당부가 먼저 나왔다.

"고위 공직자가 관직을 맡으면 무언가 결실을 내려고 하는 야망이 있어. 남해성당에 있을 때 군수가 화력발전소 세우겠다는 얘기가 나왔어. 그때 그랬지. 남해는 그런것으로 가서는 안된다. 시간이 걸릴 지는 모르지만 남해는 남해답게 가야한다. 누구 하나 파헤치기 시작하면 다들 그 발자국만 따르려 할 거다. 지도자는 자기 대에 모든 걸 이루겠다고 조급하면 안돼. 어떤 것은 논의 자체나 결정을 남겨두기도 해야 하고, 시민들의 집단 지성을 믿어야 해. 미래에 남기는 것도 지도자 덕목 중의 하나라고 봐."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얼마나 행복해 하는가라고 강조했다. 시민들이 어떤 꿈을 꾸고 있으며 자신과 자식 세대가 어떤 모습의 거제에서 살아가길 원하는지, 공직자는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국민이 먹고 살만해 졌지만 경제발전만큼 행복지수가 높아지지는 않았잖아. 거제도 마찬가지야. 전국에서 손꼽을 만큼 돈이 많은 곳이라고들 하지만, 시민이 과연 거제에 사는 것을 그만큼 행복해 하나, 그런 것을 따져봐야 해. 공무원의 능력과 돈도 그런 곳에 쓰여져야 하고."

시민들에게도 '주인다워야 한다'는 당부를 이어갔다.

"마을과 도시의 주인은 국회의원도 시장도, 시의원도 아닌 시민이야. 토대가 없이 어찌 정치가 있겠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뒤바뀌기 시작했어. 제대로 된 지방자치는 그걸 다시 되돌려 놓는 거라고 봐. 시민이 눈치를 보고 애걸복걸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돼서는 안 되는 거지. '나는 시민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라는 생각과 주장이 많아질 때, 거제의 미래도 밝아질 거라 봐."

그런 차원이었을까. 경남의 무상급식이 '파투'가 나고, 수많은 학부모들이 길거리에 나섰다. 거제서는 그 바람에 20여명의 학부모가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다. 이 학부모들을 지지하고 엄호한 구원투수로 나선 것도 배 신부였다. 도지사라고 주눅들지 않고 주권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요구하는 시민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거제로 올 수 있을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신부 '짬밥'도 있으니 원하면 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순명'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교구청, 주교님이 명령하면 어디라도 가야해. 신부는 당연히 그 곳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안식년 1년 다채울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 도중에 무슨 일이 있어 불러들이면 가야 해. 순명이라는 것이 우리 신부가 가져야 할 덕목 중의 하나야."

그는 흡사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의 돈 까밀로 신부를 떠올리게 한다. 끊임없이 빼뽀네 읍장과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인간애가 먼저인 성직자. 그 어떤 종교와 이데올로기도 인간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신념, 인간에 대한 믿음이 곧 세상에 대한 낙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신념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노 신부의 눈길에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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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16-02-01 10:23:37
수고많으셨습니다 신부님~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