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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족제비털이나 속은 개털
겉은 족제비털이나 속은 개털
  • 거제뉴스광장
  • 승인 2016.04.20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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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오늘날 대부와 사(士)라 하는 자들 치고 아마 이 붓과 닮지 않은 자는 적을 것이다. 몸은 의관을 잘 차려 입었으며 말은 조리가 있으며 걸음걸이는 법도에 맞으며 근엄한 얼굴을 의젓하게 하고서 지내니, 그들을 보면 모두가 군자요 바른 선비 같다.

그러나 남이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 있거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을 만나게 되면 뜻을 접고 욕심을 부리니, 마음에 어질지 못하고 행동에 의롭지 못한 자는 모두 이러하다. 대개 겉모습은 빼어나고 번지르르 하지만 그 속은 개털인 것이 이 붓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람을 관찰하는 자가 자세히 살피지 않고서 겉모습만 보고 속까지 믿어 버린다. 그러므로 간사한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원문] 

夫今之所謂大夫士者, 其不類於是筆者蓋尠. 衣冠其形體, 文理其語言, 規矩其步趨, 儼然莊色而處, 視之皆若君子正士然. 及其居幽隱之地, 而遇利害之塗, 則回其志·肆其欲, 不仁於心而不義於行者皆是. 蓋秀燁其外而狗毛其中, 與是筆無少異焉, 而觀人者不察也, 視其外而信其中. 故有奸人亂國而不可悔者也.

- 장유(張維, 1587~1638), 『계곡집(谿谷集)』4권, 「필설(筆說)」

[해설] 

옛날부터 붓은 족제비의 꼬리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 유명하다. 족제비는 한자어로 황서(黃鼠)라 하고 또 서랑(鼠狼)이라고도 하므로 황모필을 낭미필(狼尾筆)이라 부르기도 한다. “족제비는 꼬리 보고 잡는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꼬리털이 힘있고 매끄러워 붓을 매기에 더없이 좋은 털이다. 이수광(李睟光)은 황모필을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산품 네 가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거니와1) 명나라의 문장가이며 명필로 유명한 주지번(朱之蕃)은 황모필을 사용해 보고는 ‘천하의 제일가는 붓’이라고 하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2)

황모필이 이렇게 유명하다 보니 글씨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탐을 냈을 법하다. 장유의 벗인 이생(李生)이라는 분도 글씨 쓰는 것이 취미라 특별히 부탁해서 얻은 황모필 한 자루를 보고 퍽이나 좋아하였다. 그러나 막상 먹을 적셔 글씨를 쓰려니 붓이 힘없이 휘어져 꺾이고 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속을 채운 털은 모두 개털이고 겉에만 족제비의 꼬리털을 살짝 입혀놓은 가짜 황모필이었다. 붓의 이름과 겉모습에 속아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

이생은 깜짝 놀라 한참을 허탈감에 빠져 있다가 붓 매는 장인의 남을 속이는 기막힌 재주와 가짜를 가려내는 사람이 없어 이렇듯 속임수가 통하는 야박한 세상이 된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어찌 이 붓뿐이랴. 장유는 이생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이중성을, 특히 위정자들의 심각한 이중성을 폭로하였다. 뿐만 아니라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네의 얕은 식견에도 일침을 놓았으니, 쪽 빼입은 입성과 거침없는 달변과 점잖은 척 꾸민 태도에 현혹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사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맹자는, 인간의 신체 중에 눈동자만큼 진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상대의 말을 들어보고 눈동자를 보면 절대 속내를 숨기지 못할 것3)이라고 하였지만, 이 관찰법은 제 눈동자가 맑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또한 공자는, 하는 일을 보고 어떻게 하는지를 살핀 다음 편안하게 하는지 억지로 하는지를 깊게 살피라4)고 하였는데, 이 방법 역시 오랜 시간을 두고 옆에서 겪어보아야만 가능한 관찰법이다.

지난주에 국민의 대표를 뽑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유권자가 후보의 면면을 잘 살펴 투표해야 한다는 것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현실은 유권자 입장에서 참으로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유권자들은 그래도 각자 생업에 바쁜 가운데 후보들의 토론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여론조사를 참고하기도 하며 각 후보가 내세우는 정책과 비전을 챙겨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후보들의 진실한 속내를 알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을 아는 것이 본래가 어려운데, 허울 좋은 명분으로 포장하고 진실을 교묘히 감춰 조작하는 일이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유권자들이 장유의 일침처럼 ‘자세히 살피지 않고서 겉모습만 보고 속까지 믿어 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신경 쓰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익 추구가 최고의 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붓 매는 사람의 양심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현실을 무시한 이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붓을 사는 사람이 좀 더 현명하게 면면을 꼼꼼히 따져보고 의식적으로 개입하여 겉이 아닌 속을 보는 안목을 키워나갈 때 붓 매는 사람의 양심도 따라서 자라나지 않겠는가.

지난 수요일 대다수 유권자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한줄기 희망을 품으며 투표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자신이 뽑은 후보가 겉모습과 다름없이 내면이 성숙한 사람이기를, 또한 사심 없이 공리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며 고심 끝에 소중한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이제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당선되신 분들에게 유권자의 이러한 고심을 깊이 마음에 새겨 부디 이름만 좋은 하눌타리가 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한다.

1) 『지봉유설(芝峯類說)』권16 「잡설(雜說)」에, “우리나라의 토산품으로 중국에는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으니, 경면지와 황모필과 화문석과 양각삼이다.[我國之産, 有中朝所未有者四: 曰鏡面紙ㆍ曰黃毛筆ㆍ曰花紋席ㆍ曰羊角參也.]” 하였다.
2)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권24 「설부(說部)」에, “토끼털은 뻣뻣해서 쉽게 마르고 양털은 부드러워서 쉽게 꺾이니, 모두 우리나라의 황모필만 못하다. 태사 주지번이 내 붓을 써 보고서 ‘5일을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천하의 제일가는 붓이다.’ 하고는 수천 자루나 되는 붓을 묶어 가지고 갔다.[兔則桀而易渴, 羔則膩而易拉, 俱不若我國黃毛筆也. 朱太史用我筆, 五日握而不敗, 是天下第一品也, 多束數千枝而去.]” 하였다.
3) 『맹자』 「이루 상(離婁上)」제15장에 나오는 말이다.
4) 『논어』 「위정(爲政)」제10장에 나오는 말이다.


글쓴이 : 선종순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전주분원 전문위원
주요 역서
- 『심리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조선왕조실록 번역 및 재번역 사업 참여 
- 『국역 기언』 제2책,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종묘의궤』,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사가집』 제13책, 한국고전번역원, 2009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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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허가를 얻어 <거제뉴스광장>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  ‘고전산문’ 코너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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