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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재, 다시 '노동자'로 돌아오다
강병재, 다시 '노동자'로 돌아오다
  • 김용운 대표기자
  • 승인 2016.09.06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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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7년 6개월만에 출근하는 늙은 노동자의 꿈
무려 7년 6개월만에 대우조선해양 출입증을 받고 출근하는 강병재씨.

5일 아침 7시, 대우조선해양 서문 앞에서 만난 강병재씨의 얼굴에는 설레임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회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미소를 띠지 못했다.

작업복을 입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밀려 들어가는 그 시간, 강병재씨도 그들처럼 '평범한' 한 명의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그리워 했던 작업복이었을까. 그의 오른쪽 가슴엔 '소망이엔지 강병재'가, 왼쪽 가슴에는 '대우조선해양 출입증'이 달려 있었다. 5성 장군이 가슴에 단 어떤 훈장보다도 그의 이름표는 반짝거렸다. 그것이 곧 그의 존재가치였으므로.

비로소 강병재가 '노동자'로 돌아왔다. 2009년 3월 20일 하청노동자노조 건설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해고된 지, 기름때 묻은 장갑과 손에 익숙한 홀더와 그라인더를 놓은 지 7년 6개월만에  그가 '노동하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그는 두 번씩이나 발디딜 땅을 버리고 하늘로 향했다. 2011년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서 88일을 보냈다. 어렵게 합의서를 쓰고 땅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몸뚱아리 하나 뿐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2015년 4월 9일 새벽 어둠을 뚫고 그 허약한 몸뚱아리에 의지해 50미터 타워크레인에 다시 올랐다. '복직확약서 이행해라' 그는 까마득히 높은 크레인 날개에 잘 보이지도 않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번에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의 무사 귀환을 위해 거제시민단체와 노동단체가 대책위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모인 희망버스가 크레인 코앞까지 와서 희망풍선을 날려 보냈다. 무려 165일을 허공에서 고독과 싸운 후에야 땅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구속이라는 또 다른 옥죄임이 그를 기다렸다. 그의 안타까움을 아는 많은 시민들이 탄원서를 넣고 그의 석방을 기원했다. 법원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이라는 판결을 내리고서야 가까스로 그는 가족과 동료 곁으로 돌아왔다.

오늘 이 순간 그는 '대우조선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하노위) 의장'이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의 노동운동가가 아니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동료와 같이 밥을 먹고, 딸의 안부를 묻는 회사원이자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출근길로 북적이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2720일만에 출근하는 심정을 물었다(그는 일수를 계산해보지 않았다 했다). 그의 출근은 1일부터였다. 이틀 동안 안전교육을 받았다. 5일부터는 현장에 들어간다. 사실상 첫 출근이나 다를 바 없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그가 웃었다. "고향에 온 것 같다. 일을 하게 돼 너무 기쁘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노동이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내가 하는 노동으로 사회가 발전한다는 진리를 다시 생각한다"고 했다. 대개의 경우 노동을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한 '의무'로 여기는 마당에 그는 노동을 '권리'라고 강조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현장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돈보다도 일터를 원한다. 현장이 곧 자신의 삶이고, 일을 해야 현장감이 생긴다. 그래야 현장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다시 하청노동자의 대변인으로 돌아갔다. 그가 끝내 현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 노동의 즐거움이나 돈벌이만이 아닌, 같은 처지에 놓인 숱한 하청노동자들과의 교류라는 목적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작업복을 입고 출입문을 통과하면서 생각했다.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았다. 다들 꼭 만나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다. 기사로라도 먼저 인사를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빠트리지 말고 잘 써 달라는 부탁이다. 꼭 전하겠다고 답했다. 조만간 고마운 사람들에게 밥 한끼 사겠다는 말도 보탰다. 혹시 빠지더라도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것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우려하는 시선이 없지 않은지 물었다. 하청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주위 분위기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하청노동자인 이상, 하청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임은 자명하다.

"일단은 편하게 생각한다. 현장 일 익히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하지만 하청노동자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 이들이 기댈 곳이 없지 않느냐. 하노위가 그나마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 회사가 탄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상황이 닥치면 그때 가서 대응하겠다." 예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배포와 경륜이 묻어났다.

그의 복직이 단순한 자연인 강병재의 복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는 매일 출근에 앞서 하노위 사무실을 들른다. 그동안 해오던 하노위 활동도 '진행형'이다.

"나 혼자 복직해서 밥 먹고 살라고 그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은 게 아니지 않느냐." 자신의 복직이 대한민국 수많은 하청노동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굳게 새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해고될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그렇게 커 버렸다. 세상 어느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회적 소명'을 이유로 자식의 인생을 흐트릴 수는 없다. 그는 늘 그 점이 아팠고, 걱정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 의도된 결과로 나타났다.

"엄하게만 하고, 사랑이란 걸 베풀어주지 못한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 긴 해고자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마음을 다친 사람은 바로 그 아이다." 그는 딸애의 상처가 빨리 낫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아이'는 꿋꿋하게 잘 자랐다. 웃음도 늘었다. 올 여름에는 거제 와서 아버지와 지내며 알바도 했다.

출근이 늦지 않을까 시계를 들여다보는 횟수가 잦아졌다. 더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마지막 한 마디를 부탁했다.

"이 작업복과 출입증은 나의 새로운 인생이다.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길이 바른 것인지 늘 되새기겠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의 희망어린 눈동자를 보고 싶다"고 했다.

공자는 서른에 뜻을 세운다 했다. 이미 하늘의 뜻을 알고도 남을 지천명이 훌쩍 지나버린 그가 '새로운 삶'을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현장을 떠날 때까지 그의 노동이 행복하기를,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따뜻한 친구로 남아 있기를...

마치 목사가 신도들을 위해 올리는 축도처럼 서둘러 발길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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