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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절벽시대
[칼럼] 절벽시대
  • 거제뉴스광장
  • 승인 2016.09.0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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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거제대 교수, 거제경실련 정책위원장)

수주절벽, 발주절벽, 소비절벽, 취업절벽, 결혼절벽, 취미절벽, 여행절벽, 인구절벽, 주택절벽, 안전절벽, 소통절벽 ......그리고 희망절벽. 오늘자 뉴스에서는 물론 어제뉴스에서도 듣고 본 절벽시리즈가 온통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절벽’타령을 하며 붙이기만 하여도 시대를 엿볼 수 있는 단어, ‘절벽’은 지난 여름날 열대야로 뒤척이던 밤들보다 괴롭다.

얼마 전인가. 이제 막 청년인 그는 작업용 가방에 컵라면 하나를 보물같이 넣어두고 먹지도 않은 채 세상을 떠났고, 고시방에서 서류전형 탈락 소식을 들은 늦깎이 청년은 고향 갈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래도 할 것은 공부 뿐이라고 입 다물고 허리 주린 채 독서실과 편의점을 돌며 지내던 대학청년은 자신의 마지막을 20층 난간에 세웠다. 그곳은 그들의 절벽이고 세상의 끝이었다. 낭떠러지를 향해 선 이들은 그 어떤 말과 글도 남기지 않는다. 어쩌면 그 순간의 표정에서도 그간의 작은 사연조차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을 위한다는 시대, 청년일자리 창출의 시대, 창조경영의 시대, 대박의 시대. 다정하고 사람을 위할 것만 같았던 지도자가 보여준 언어들은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되어 주었을까? 우리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는 세계경기의 침체 속에서 출근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공장엔 어떤 바람이 있을까?

길을 걷는다. 산업단지를 걸었다. 그곳엔 내일만을 염려하며 굳은 눈빛으로 성근 무리가 되어 퇴근하는 이들이 있다. 여기서도 그저 무표정한 근로절벽만 본다. 그러다 눈을 돌리니 국밥집 문설주에선 ‘임시휴업’이라고 쓴 종이 한 장을 든 주인이 마주 뵌다. 모두에게 희망이 없다. 퇴근하며 내일의 출근을 기뻐하겠지만 거리의 누구에게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입구다. 빈 장바구니를 둔 중년의 여인이 출입구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다. 장보기가 민망했을까? 다시 아파트 담장을 지나니 서너명의 중학생이 볕을 피해 그늘진 곳에 서있다. 늘어진 그들의 손에는 연기 피어오르는 담배가 들렸다. 그들에겐 이미 가족이란 게 불법으로만 여겨질 일, 그렇기에 더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피할게다.

도심의 빈 식당 앞을 지나며 금뺏지니 금숟가락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다. 또 뉴스가 시작되는 시간. 사람이 드문 길에는 흙 한 줌도 없지만 금마차가 지나간 듯 흙먼지가 일어나고 딱지들만 뒹군다. ‘즉시대출’, ‘24시간 봉사’ 등등이 발끝에 차이고 카드 속에서 곱상한 여인이 희망 같은 미소로 있다.

절벽, 이곳에서는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그렇다고 중간에서도 긴장을 풀 수 없다. 멈추는 건 추락이고 낙오다. 오직 그 처지가 곤란할 뿐이다. 바위를 깎아 세운 것처럼 아주 높이 솟아 험한 낭떠러지 세상이 절벽이라면, 이 만큼 시각적이고 감정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 이 분명한 이미지를 체감하면서도 피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에서 어쩌면 진정한 절벽을 느끼게 한다.

절벽 앞에선 무엇을 해야 할까?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 하지만 그 길을 누군가가 막고 있다면 그가 잠시 비켜나서 길을 내어 주어야한다. 나누지 않는다면 누구도 새로운 절벽에 맞닥뜨려 편히 나아갈 수 없다. 절벽시대는 나눔의 시대다. 나눔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이어야 한다. 일자리는 나누고 이익을 분배하여 복지를 펼치고, 부정을 끊고 부패를 일소해 바른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절벽시대의 해법이다. 이를 위한 구조조정은 허락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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