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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미술관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협주곡 ‘황제’
시골 미술관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협주곡 ‘황제’
  • 노재하 기자
  • 승인 2018.02.14 2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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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담갤러리, '유경아 초대 연주회' 이어 '기획전'도 열어
▲ 거제면 초담갤러리는 매월 첫째주 화요일이면 그림 전시회와 함께 유경아 피아니스트의 초대 연주회가 열린다. 지난 6일 다음달 17까지 열리는 지역작가 전시회 오프닝에 이어 유 피아니스트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고 있다.

거제면 읍내로, 문재인 대통령 생가 진입로에 위치한 작은 화랑 초담갤러리에서는 매달 첫째 주 화요일마다 베토벤의 음악이 열린 창으로 새어나온다.

6일 저녁 7시에 시작한 연주회에는 30여명의 고정 팬이 있을 정도로 성황이다. 이곳을 주요 모임장소로 활용하는 ‘차와 좋은 사람들’이 다수의 좌석을 채우지만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 베토벤과 피아노를 사랑하는 시민들도 꽤 모여든다.

재작년 12월에 문을 연 초담갤러리 김진희 관장은 개관 당시부터 이 연주회를 기획해왔다.

“죽림 앞바다에 떠 있는 달, 옥산금성의 시원한 한줄기 바람, 동헌의 샛노란 은행잎이 우리 거제를 향기롭게 하고, 익숙하고 친근한 이웃이 있어 거제가 정겨워지고 있습니다...조금씩 아쉬웠고 모자란 것들을 채워 여기 새로운 곳에서 거제의 이야기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2층 갤러리에 오르는 계단에 드리워진 인사말이다. 그에게 갤러리는 단순한 그림 전시에 그치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 풍경 한편에 미술관을 오픈했지만, 그곳이 그림과 차와 음악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기를 원했다.

▲ 초담갤러리 김진희 관장이 유경아 피아니스트와의 인연을 소개하며 음악과 그림이 함께하는 기획전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음악이 곁들어진 갤러리를 꿈꾸던 그에게 마침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창원 진해에서 유서깊은 문화공간 ‘흑백’을 찾았다가 피아니스트 유경아씨와 조우, 지금까지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흑백’은 진해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던 음악다방 이름으로 유경아씨의 부친인 서양화가 유택렬씨가 1955년 문을 열었다. 이중섭, 유치환, 김춘수, 서정주 등 동시대 예술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70년대 마땅한 전시관조차 꿈도 꾸기 어렵던 시절, 흑백은 진해 문화의 중심지였고 많은 연인들의 데이트장소이자 클래식을 감상하는 음악관이기도 했다. 유 화가가 작고한 이후 유경아씨가 뒤를 이어 이 곳을 연주회장이자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피아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유경아. 한양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영국 왕립음악원을 수료했다. 개인독주회 7회를 비롯해 왕성한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가 김 관장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겅의 한 달에 한 번 거가대교를 건너 먼 시골 동네를 찾는다.

입춘 한파가 매섭던 이날 연주회는 1시간 30분 정도 계속됐다. 그의 연주는 흡사 잘 차려진 한 끼 서양식 코스요리와 같다. 너무 가벼운 것만 먹어 먹은 것이 없다는 느낌이 없도록, 너무 강한 음식만 먹어 체하는 일이 없도록 강약을 조절한 배려가 돋보인다.

‘나뭇잎배’ 같은 동요를 오프닝곡으로 삼아 아마추어가 대부분인 청중들이 쉽게 연주회에 마음을 붙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챙긴다. 일종의 애피타이저인 셈이다.

디저트라 할 만한 엔딩곡은 자신이 작곡한 수백 곡 중에서 한 두 곡을 뽑는다. 대개의 경우 ‘고백’ ‘노을’ ‘사랑한다는 건’과 같은 시인의 시에 곡을 입힌 것이다. 다른 사람의 연주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곡이지만 귀에 익숙한 음률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지닌 작곡의 힘을 것이다.

메인곡에 앞서 베토벤의 소나타 14번 월광과 같은 대중적인 클래식이 장식한다. 성찬을 앞두고 마주한 사이드 요리와 같다. 유 피아니스트는 소나타는 원래 4악장이 기본인데 이 소나타는 특이하게도 3악장으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중간 중간 베토벤의 생애와 곡에 얽힌 사연 등을 전해주는 것은 이제 곧 시작될 그의 연주가 200여년 전으로 시공을 이동하기 위한 것임을 암시했다.

앞선 8월 베토벤의 소나타 23번 ‘비창’이 한여름 빗줄기 사이로 울려 퍼졌고, 9월 달빛 아래에선 ‘월광’이 초가을 문턱을 넘어 공기를 갈랐다. 10월에는 ‘열정’ 소나타가 연주됐다.

이날  메인 곡은 소나타가 아닌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였다. 베토벤이 작곡한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황제'는 베토벤의 최대 역작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 유경아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에 대한 생애와 연주곡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실내임에도 다소 차가운 날씨 속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힘든 30여분 간, 연주자는 머리속 악보를 그려가며 장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색채의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격정적으로 연주했다. 악보도 없이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보통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경우를 예술혼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때로는 느릿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는 연주자를 따라 관객도 함께 움직였다. 거대한 콘서트홀과는 달리 아담한 갤러리에서 느낄 수 있는 연주회의 장점이다.

쉼 없이 피아노 건반 위를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유경아씨는 한 동안 피아노 앞을 떠나지 못했다. 겨우 일어서 물 잔을 집어드는 손가락이 떨렸다. 힘들어 보였다.

“음악은 노동이라는 말, 왜 피아노 연주는 남자가 잘 어울린다는 말이 이해가 되나요?”

유경아씨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고, 청중들은 끄덕거림으로 무언의 화답을 보냈다. 그리고 짙은 손뼉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연주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은 저마다 준비해 온 간식을 차려놓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김밥, 과일, 고구마, 옥수수, 차와 커피 따위가 상에 오른다. 자연스레 사람 사는 이야기가 옹기종기 펼쳐지고 음악과 차, 그림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연주자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어떤 이는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연주회는 무료다. 따로 티켓을 팔지 않으니 당연하다. 간식을 준비해오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 식구처럼 나눠 먹는 것이 익숙한 분위기다. 정 꺼림칙하면 커피값 정도 통에 넣으면 그만이다. 처음 온 사람은 인사하고 박수를 받는다.

“작은 연주회지만 더없이 큰 연주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이 어디 장소에 구애받음이 있던가. 연주자의 열정이 관객의 감동과 어우러지면 그것이 가장 큰 연주회일 터. 김 관장은 시민들이 많이 알고 연주회에 오면 좋겠다고 했다. 이들 중 ‘차와 좋은 사람들’ 회원이 되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한편 이날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지역 작가들의 기획전 오프닝도 가졌다.

지역에서 활동 중인 최위숙, 조창희, 곽지은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김 관장이 1995년부터 소장한 중견 작가들의 작품 10여점이 다음달 17일까지 전시된다.

▲ 김진희 관장(왼쪽)과 거제면 출신 하광렬(오른쪽 두번째) 세무사, 김용운 전 경실련 집행위원장 등이 유경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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