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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거제 최초 근대학교, 사립거제보통학교
(5)거제 최초 근대학교, 사립거제보통학교
  • 전갑생 시민기자
  • 승인 2015.01.2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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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거제 근현대사 100선> 다섯번째 이야기

“아동신체의 발달함에 비추어 국민교육의 기초와 그 생활 필요한 보통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것”(소학교령 1895. 7. 19)

“학도(학생)의 신체발달에 유의하여 도덕교육 및 국민교육을 실시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보통지식과 기예를 배우는 것”(보통학교령, 칙령 제44호, 1906. 8. 27)

앞의 두 문장은 매우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앞이 대한제국이 제정한 소학교령의 목적이고, 뒤에 나온 게 통감부의 보통학교령의 교육목적이다. 이렇게 교육목적이 유사할까.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앞의 소학교령의 제정 계기가 김홍집 친일내각의 구성에서 시작되었다. 뒤에 나온 보통학교령은 통감부의 식민지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이 식민정책에 순응하는 식민지인을 만들고자” 근대 교육기관 설치를 서둘렀다.

이미 외국 선교사나 뜻 있는 여러 한국인들은 사립학교의 교육목적을 ‘민주’와 ‘민족’에 두고 있었다. 결국 일제는 사립학교의 설립 확장과 독자적인 교육정책을 막아내고자 했다.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의 공포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이처럼 일제가 조선의 교육문제에 유독 철저히 대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럼 사립거제학교가 어떤 탄생 배경과 성장해 왔는지 한 눈에 살펴보자.

▲ 1934년 3월 제25회 거제보통학교 전경. 사진 중앙에 기성관과 그 뒤편에 운동장, 학교 교사 등이 보인다. 사진 중앙에서 좌측 편에 옛 거제동헌 거제면사무소, 우측으로 초가 민가들로 즐비하다(거제초등학교 제공).

군민, 거제학교 만들어

사립거제학교(지금의 거제초등학교)는 거제의 행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거제군청 소재지 서부면(지금의 거제면)에 있었다.

보통학교령 공포 약 7개월 이후 1907년 2월 10일 거제군수 고희준이 “인민을 위한 교육”이라는 취지에서 자비 100환(1환=2원=200원, 1908년 기준 최상품 현미 1가마 10원)을 선뜻 내놓았다. 그가 학교 설립에 뜻을 둔 이유는 1906년 3월 보빙대사수행원으로서 일본학습원과 화족학교(일본)의 교육제도를 시찰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군민들은 군수의 자발적 지원금에 보조금 800환을 모아서 학교를 설립했다(대한매일신보, 1908. 12. 6). 고희준의 종잣돈이 학교 설립에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실제 학교 설립자는 800환을 모아서 낸 거제 군민이다. 초기 학교 임원들은 김경식, 유공환(학교원,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 이사) 등이라고 알져 있다.

이 시기 한국의 보통학교는 관립(국고 지원), 공립(도·군 전액 비용 지원), 사립 세 종류가 있었다. 거제학교는 사립학교인데 설립인가서에 학교 명칭, 개교 예정기일, 설립자 이력서, 학교 부지 도형(단 지명·평수·방위·교사 위치 명기), 교사의 평면도(단 각 교실의 면적·위치 명기), 수업료 징수 때 학생 1인당 월 금액, 1개월간 경비 수지예산, 학교유지 방법(기부금 및 기본금) 등을 기재했다. 1907년 9월 거제학교는 “청년영재가 자발적으로 찾아와 학업을 하니 일취월장한다”고 주변에서 칭찬을 받았다.

▲ 거제군수 고희준. 그는 사립거제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군민들이 모은 성금을 유용한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다. 훗날 고희준은 일진회나 각종 친일반민족행위 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위기에 맞서

이 학교는 중앙언론에서 ‘모범적인 학교’라고 집중 재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학교는 설립 1년 6개월 만에 최대 위기를 맞는다. 1908년 5월 윤영우 외 5명이 경제담당 부서 농상공부에 “거제군에서 해산물을 채취해 영업하는데 세금을 경성에서 내려온 직원도 징수하고 거제학교에서도 또 징수하니 양쪽 중 한 곳은 금지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들은 이중 과세에 큰 부담을 느껴 정부에 볼멘소리로 청원한 것이다. 거제군은 어민들의 세금을 ‘갈취’해서 학교의 운영비를 충당한 셈이다.

또한 같은 해 9월 민간후원금 2,000환과 학교 임원의 모금 1,800여 환 전체 3,800환이 모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제학교 교사들은 몇 개월 동안 월급 한 푼 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거제사회는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급기야 학교 임원 유공환은 교육담당 부서 학부에 가서 거제향교 소유 논, 옛 거제부청 부속건물 사령청 논, 거제한산어기조합 소속 어장, 거제한산모곽전합 해모곽전(바다 미역밭) 등에서 나오는 세금을 떼어 내어 거제학교 운영비에 충당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결국 정부는 유공환의 제의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럼 어민들의 피와 땀으로 모금한 3,800여 환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1908년 12월 진남군수 고희준은 거제군수 재임 시절 각 면에서 모금한 2,500환과 모곽세(미역밭 세금) 1,100환, 어기조합 방매한 3,600환 등 총 7,200환을 학교에 기부한다고 호언장담했다.

여기에 거제군민들이 모금한 3,800환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거제사립학교 교원 유공환(兪公煥) 등에 따르면 고 군수는 대구감독부와 창원 이사청에 내왕 운동비(로비 자금), 학교의 우등생으로 향교직원에 채용한다고 몇 살 안 된 3명에게 각각 40원식 주면서 향교 장의로 채용시켰다.

더 나아가 고 군수는 백성들의 어장을 탐해 헌병과 순사까지 동원했다. 이에 어민들은 군수에게 순사들의 불법을 신고해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고 군수가 거제학교 “개교식 당일 기생 홍도 집에 가서 술을 먹고 분서 총순을 꾸짖고 욕하며 구타”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 진남군(지금의 통영시) 탁태윤은 진남군수 고희준에게 붙어 거제군 민간 어장을 거제학교에 부속시킨다고 사기를 친다. 탁씨은 고희준을 만나 민간 소유 어장을 어기조합과 각 어민에게 반값에 매매한다며 100환식 챙겨 기생과 함께 경성으로 도주했다. 이에 어민들은 탁에게 거금 100환식을 주고 어장조차 받지 못해 졸지에 실업자로 바뀌었다.

고희준은 학교 설립에 혁혁한 공을 인정한다고 손치더라도 비리와 공금 착복까지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앞서 1906년 11월 지방관 전고(詮考, 지방관리 선임 논의기구)위원회는 진해만 일본군용지 조서를 담당할 “거제군수 고희준과 웅천군수 신석린이 일본어와 외교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특별히 임명했다.

이에 통감부는 개인의 비리보다 군항지 문제를 더 우선시 했다. 그 결과 1907년 5월 일본해군성은 고희준 등에게 보고를 치하하면서 200환을 하사했다. 훗날 고희준은 일진회에 들어가고자 진남군수직을 사퇴하면서 삼고초려 끝에 가입했다.

▲ 1926년 3월 제15회 졸업생들. 여전히 기성관은 거제보통학교 교사였다. 졸업생 뒤편에 지금 모습과 다른 기성관을 볼 수 있다(거제초등학교 제공).

거제학교, 통감부에 빼앗기다

존폐 위기에 몰린 거제학교는 개교 때 온돌방에서 시작하다가 1909년 3월 제군수 이재성에 의해 교실과 운동장을 넓혔다. 1908년 9월 진해만방비대 해군 소장 미야오카 나오키(宮岡直記)는 거제학교에 대한지도(大韓地圖)와 만국지도 각각 1부와 기부금(10환) 등을 냈다. 학교는 재정 문제로 힘들었다. 군민들은 우리의 손으로 직접 학교를 세웠다는 자부심만큼 유지되었다.

제1회 졸업생들은 수신(도덕), 국어(한글), 한문, 일본어, 산술, 지리역사, 이과(과학), 도화(그림), 체조 등을 배웠다. 입학 연령은 만 8세부터이고 수업연한은 4년이었다. 제1학기는 4월 1일∼8월 31일까지, 제2학기는 9월 1일∼12월 31일까지 제3학기는 1월 1일∼3월 31일까지, 수업시간은 4월 1일∼9월 31일까지 오전 8시∼오후3시, 10월 1일∼다음해 3월 31일까지 오전 9∼오후4시까지였다.

휴업일은 만수성절(萬壽聖節, 고종황제 생일, 9. 8), 천추경절(千秋慶節, 황태자 생일, 7. 25),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 조선개국, 7. 16), 흥경절(興慶節, 조선시대 고종즉위일, 음력12. 13),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대한제국 개국 및 고종황제 즉위일, 9. 17), 일요일, 춘계휴업(4. 1∼10일), 하계휴업(7. 11∼8. 31일까지), 동계휴업(12. 29∼다음해 1. 7일) 등이다.

거제학교의 제1회 졸업식은 사립학교의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1909년 4월 6일 본교에서 본과 졸업생은 유진홍 외 6명이다. 2년급 우등생은 신용우 외 5명, 1년급 우등생은 박형근, 하익원 등 4명이었다.

이날 교장 윤영현(거제군 주사, 1906. 12∼1909)은 학생들에게 졸업증서를 전달하고, 이재성 군수는 상품과 축사를 했다. 졸업생 대표 이만성이 답사를 마치고 전부 애국가를 제창했다.

통감부는 보조지정학교제를 통해 건실한 사립학교를 사립통학교로 전환시켜 공립화시켰다. 그 대상에 사립거제학교가 선택되었다. 1909년 5월 거제학교는 ‘학부보조지정 사립거제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거제군민이 설립한 학교를 통감부에 빼앗기는 슬픔을 당하고 말았다. 통감부는 본과 훈도 겸 교감인 일본인 교원 센게 키요사브로(千家曉三郞, 1909. 8. 6∼1917) 와 통역 담당 부훈도 林鍾翰(1909. 5. 26∼1919, 관립한성사범학교 강습과 1회생)을 거제사립보통학교에 파견했다. 이런 교육정책은 통감부의 식민지 모범교육의 확장이자 사립학교를 물질적인 힘을 이용해 강제적으로 공립학교로 재편하는 과정이었다.

사립거제보통학교는 1910년 3월 학생 증가에 따라 옛 거제부의 객사 기성관을 빌려서 교사로 사용한다. 제2회 졸업식은 1910년 4월 6일 기성관에서 보습과 10명의 졸업생과 보통과 4학년 진급생 15명, 3학년 진급생 20명, 2학년 진급생 25명 전체 학생 70명 외 1학년생, 지역 유지 등이 다수 참석했다.

학생들의 주요 인물을 보면 졸업생에 신용우(하청학우회 임원), 진급생 중 하탁원·하익원·하준원·백남규·하선원·하선모 외에 사회주의 운동가 신용기 등이 보인다. 5회 졸업생 양명 등이 있다.

같은 해 11월 사립거제보통학교는 교장, 교감, 교사, 일반직원 포함해 5명이고 학생 138명과 1년 전체 경비 1,230원 정도였다. 학교는 1911년 4월 8일 사립학교를 폐지하고 공립통학교로 다시 인가를 받았다.

따라서 사립거제보통학교는 거제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고, 3개 학급과 일본인 교장 1명, 한국인 교사 3명 전체 4명의 교직원이고 학생 115명, 1년 경비 2,084명이었다. 1911년 4월 20일 훈도 이규한(李圭翰, 1912년까지 재임, 이후 부산, 삼가, 달성 등지에서 교직생활)과 7월 24일 부훈도 염상우(廉相雨, 1911∼1914년 부훈도) 등이 부임했다. 특히 1911년 6월 10일 공립거제보통학교·거제학교조합 및 거제심상소학교 개교식, 거제군어기모곽전조합 순라선 준공식 3개의 행사가 동시에 열렸다.

▲ 1975년 거제국민(초등)학교 전경. 사진에 보이는 본관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교육의 산실로

거제보통학교는 1924년 6월 4일 기성관 옆에 지방유지의 기부금과 경남도 보조금 5천원을 투여해 50여 평의 교사를 증축했다. 1938년 3월 4일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거제공립보통학교는 거제성내심상소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1941년 3월 31일 거제성내심상소학교가 거제성내국민학교로, 1946년 5월 10일 지금의 명칭과 동일한 거제국민학교(초등학교)로 변천되었다.

올해 개교 108년을 맞는 거제초등학교는 1956년 6월 석조 2층 본관 건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제105회 졸업생까지 11,882명을 배출한 거제지역의 공교육을 이끌어가고 있다. 거제초등학교는 개교 초기 역경에서 벗어나 거제제일의 공교육 산실로서 다시 태어났다.

 



전갑생 시민기자는 거제 출신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했고, 현재는 방송통신대학교 외래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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