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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균형감각
정조의 균형감각
  • 거제뉴스광장1
  • 승인 2015.02.0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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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분사 아문(分司衙門)은 체통이 특별하므로 수신을 유수(留守)라고 부르며 정2품의 관찰사 이하는 부치(府治)를 지나가려면 먼저 신분을 밝히고 반드시 명함을 제시하도록 제도를 엄중하게 설치하였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체통에 관계된 일들이 모두 파괴될 것이니, 관찰사라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하찮은 수령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세폐(歲幣)를 가지고 가는 차사원은 아래에서 차임해 보내는 만큼 명을 받들어 사문(赦文 임금이 내린 글)을 가지고 가는 차사원보다는 아래인데 아전과 장교를 잡아 족치고 애당초 막무가내로 나아가려고 했으니 진실로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잘못이 있다. 만약 부속(府屬)들이 차사원의 몸에 직접 손을 대는 일만 없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처분하겠는가. 그러나 유수영(留守營)의 체통은 체통이고 관원과 하속 사이의 등분(等分)은 별개의 문제이다. 등분과 체통을 비교할 때 체통을 잃으면 그 폐단이 격례를 어기는 데에 그치지만, 등분을 훼손하면 그 폐단은 풍교(風敎)에 관계된다. 이 때문에 피차간의 경중을 참작하여 훨씬 무거운 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부(本府)의 토속(土俗)은 무(武)를 숭상할 뿐 아니라 기력(氣力)을 숭상하니 국가가 위급할 때에 의지할 수 있는 지역이다. 만일 이번 일 때문에 처분의 근본 취지를 모르고 내려오는 체통과 격례에 관계된 일을 소홀하게 방치한다면 그 또한 말이 되겠는가. 수신은 이 뜻을 알고 잘 처리해야 할 것이다.

[원문]

分司衙門體貌自別。守臣稱以留相。輔國觀察使以下過府治者。通謁必納剌。其制置之嚴重有若此。則凡係體貌間事。一有破壞。觀察使尙難免其責。況幺麼守令乎。且況歲幣差員之自下差送。反下赦文差員之奉命出去。而推治吏校。初不往復。如進來之樣者。誠有時例之失。若使爲府屬者無襯身犯手之擧。則處分何必如許乎。留司體貌自留司體貌。官下等分自官下等分。以等分較體貌。失於體貌其弊止於格例。毀却等分。其害關於風敎。此所以斟量於彼此輕重。不得不用加一倍之典。…… 本府土俗。尙武之外。專尙氣力。爲緩急可恃之地。萬一以今番事。不知處分之本意。有所放忽於流來體例間事。則亦豈成說。宜令守臣知此意修擧。

- 『일성록(日省錄)』 정조 22년(1798) 4월 26일

[해설]

1798년(정조22) 연초에 적성 현감(積城縣監) 이언희(李彦熙)가 왕명(王命)을 전달하는 차사원의 임무를 맡아 개성(開城)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성문을 지키던 군졸들이 저지하자 실랑이 끝에 손찌검을 당하고 옷깃이 뜯어지는 봉변을 당했다. 하급 관원이 상급 관원에게 손찌검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작은 사건이 아니다.

더구나 상하 신분 질서가 엄격하던 조선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개성 유수는 아랫사람들의 보고만 믿고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관련자들을 가볍게 문책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런데 이 일이 대간(臺諫)의 상소에서 언급되어 재조사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경기 감사가 두 번에 걸친 조사 끝에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보고했다.

경기 감사는 보고서에서 ‘차사원이 고을에 들어왔을 때 아전과 장교들이 나가서 기다리지 않은 것은 이미 그들에게 차사원을 멸시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고, ‘차사원이 그들을 문책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라며 이언희를 두둔했다. 그리고 성문의 군졸들이 그 일을 ‘수치로 여겨 감히 맞서서 다툴 생각을 하고 상급자에게 고자질’하여 결국 ‘차사원의 수행원을 잡아들여 행패를 부리고 임금의 명을 받든 관리를 곤경에 몰아넣었다’라고 하였다.

지금 상황으로 비유하면 지방 도청의 경비원이 출장 온 정부 중앙 부서의 관리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가 상대가 자신을 깔보고 무례하게 굴었다고 해서 동료 경비원들과 합세해서 폭력을 행사한 셈이다. 이런 시각에서 경기 감사는 처음 말썽을 빚은 성문의 군졸은 물론 수석 아전, 비장, 서리, 군관 등 지휘 계통에 있는 모든 사람을 엄격히 처벌하여 완악한 습속을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조에서도 감사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관련자들에게 모두 체벌을 가하고 유배해야 한다고 강경론을 펼쳤다.

위의 인용문은 이 사건에 대한 정조의 최종 판결문인데, 신하들과는 확연히 다른 시각을 볼 수 있다. 일방적으로 군졸, 아전, 장교들의 잘못만을 매도하며 엄벌을 주장한 신하들과 달리 정조는 먼저 차사원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가 원인 제공자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렇더라도 그들의 잘못이 용서되지는 않는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하들의 건의대로 관련자들 중 일부는 먼 지역으로 유배하고, 일부는 차사원 이언희가 수령으로 있는 고을에 유배하는 중벌을 내렸지만 “만약 부속(府屬)들이 차사원의 몸에 직접 손을 대는 일만 없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처분하겠는가”라 하여 이것이 이례적인 중벌임을 분명히 밝혔다. 더욱 눈여겨볼 점은 이 처벌이 개성 지역 사람들의 씩씩한 기상을 꺾는 부작용을 낳아서는 안 되며, 지켜야 할 관행과 규정을 소홀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는 마지막의 지적이다.

지금도 어떤 사건이 생기면 위의 경기 감사나 형조의 관원들처럼 한쪽의 잘못만을 부각하며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관련 기관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경우도 있고, 잘하고 있던 일도 시행 과정의 오류가 불거졌다 하여 일 자체를 취소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럴 때마다 사안의 본질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득과 실 사이의 경중을 헤아릴 줄 아는 균형 감각이 못내 아쉽다.


글쓴이 : 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 번역위원
주요 번역서
-  정조대 『일성록』 번역 참여
- 『고문비략(顧問備略) 』, 사람의무늬, 2014

 

 

 

 

-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허가를 얻어 <거제뉴스광장>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  ‘고전산문’ 코너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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