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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명절 설날(元日)
민족의 명절 설날(元日)
  • 고영화
  • 승인 2015.02.1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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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먹기 서러워 설, 첫날이라 낯설어 설, 몸을 사리는 날이라 설

'설'이라는 이름의 유래로는 ‘나이 먹기가 서러워 설날’, ‘새해의 첫날이라 낯이 설어 설날’,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니까 해가 선(立)다고 해서 설날’이라 한다는 등 여러 설이 많다. 또한 설날의 ‘설’은 몸을 사리다의 ‘사리다’ 즉 ‘조심하거나 경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가오는 설날 아침엔 마음을 ‘사리고’ 몸가짐을 경건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섣달 그믐날(음력) 밤에는 온 집안을 밝혀놓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겁을 주어 가족끼리 오랜만에 만나 정담을 나누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전통 풍습이 있다. 설날은 새해의 첫 날을 기리는 명절이다.

설, 원일(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이라고도 하며, 조심하고 근신하는 날이라 하여 신일(愼日)이라고도 일컫는다. 또 새해 인사 중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이 있는데 그 속에는 복은 항상 먼저 주어야 한다는 우리의 사랑과 봉사 희생정신이 담겨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홍익(弘益)의 심성(心性)인가. 그야말로 더불어 사는 민족 고유의 문화라 할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원일(元日)에 서로 인사드리는 것을 ‘세배(歲拜)’라 한다. 원일에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서로 다투어 모이어 노름을 하며 술을 마시고 놀며 즐긴다”고 적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설날 풍경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새해 아침에는 설빔으로 갈아입고 웃어른에게 세배(歲拜)하고, 부부간에 맞절하고, 조상님께 정성껏 준비한 제물과 떡국으로 차례를 지내고 동네 어른을 찾아 새해 인사를 드리면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했다. 그러면 어른께서 새해에 이루어야 할 소망에 대해 긍정적으로 덕담(德談)을 내리시고 아이들에게는 "절 잘한다."라고 칭찬하시면서 세뱃돈을 주기도 한다.

사내아이들은 겨우내 움츠렸던 팔다리를 단련시키기 위해 제기를 차거나 연을 날리고, 아낙들은 널을 뛰면서 대소 간에 하나가 되고, 식구들과 오순도순 모여서 근본 뿌리로 돌아감을 잊지 말라는 윷놀이를 즐기면서 형제, 동기간에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다.  설날 악귀를 쫓는다는 풍속에 따라 석 잔의 술을 마시기도 했다(應俗三盃酒).

원일(元日)을 《서경(書經) 황호(黃㦿)》에서, 정월 상일(正月上日)이라 하였으니, 곧 정월 1일이다. 해의 으뜸이며 달의 으뜸이며 날의 으뜸이므로, 삼원 절일(三元節日)이라 한다. 사당에서 새해의 제사를 지내고 상하가 경하(慶賀)하는 예(禮)로는 이 날을 가장 중하게 여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제(墓祭)를 아울러 지낸다. 원일(元日 설날) 5경(更)에 향을 피우며 촛불을 밝히고 술ㆍ과일ㆍ메[素]를 상 위에 차려놓고서, 가족들을 거느리고 산천(山川)ㆍ토지(土地)ㆍ오곡(五穀)의 귀신에게 풍년이 들기를 빈다. 그리고 설날에 먹는 신반(辛盤)은 파ㆍ마늘ㆍ부추ㆍ여뀌잎ㆍ겨자를 섞어 만든 음식을 말하는데, 이것을 먹으면 오장(五臟)이 건강해진다고 한다.

음력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보름까지가 본격적으로 연을 날리는 시기이다. 대보름이면 ‘액(厄)연 띄운다’ 하여 연에다 ‘厄’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송액(送厄)’이니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 써서 액을 연에 붙여 멀리 날려 보낸다. 또한 정월 초순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하는 놀이로써 짚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고’를 놀이 기구로 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윷놀이'는 우리나라 설날놀이의 하나로,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대보름날까지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설날 특유의 습속도 많았다. 설 전날 밤에 대문을 활짝 열어두는 풍속이 있었는데 자정 넘어서부터 시작되는 새해에 복이 집안으로 굴러 들어오길 바라는 염원에서 비롯된 습속이다. ‘설 전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 진다’는 어른들 말에 철모르는 어린 것들은 밤새도록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야 했다. “복조리 들어갑니다.”라고 외치면서 담 너머로 복조리를 던져 넣던 ‘복조리 꾼’도 추억의 한 장면을 메운다. 쌀이 부(富)의 척도였던 농경시절부터 한 해 동안 식량이 넉넉해서 삶이 풍요롭길 바랐던 우리네 습속 중 일부분이다. ‘설날 아침 여자애들은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이상한 불문율도 있었다. 남존여비 사상을 지녔던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민간 습속이었다. 어쨌든 어린 여자애가 설날 점심 무렵까지 이웃집에 못 가도록 했다.

옛날 거제도에, 목욕을 자주 못하던 시절에도, 추석과 설날에는 아이들 목욕을 반드시 시켰다. 그래서 섣달 그믐날 집집마다 아이들 목욕하던 풍경이 펼쳐졌고, 설날에는 아이들이 번지르한 외모에 설빔을 차려입고 세뱃돈을 챙겨 1년 중에 가장 귀티 나는 하루가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아름다운 명절에 구정(舊正), 신정(新正), 양력설, 음력설이 아니라 '설'이라고 바로 불러 우리의 경천(敬天) 숭조(崇祖) 애인(愛人) 정신이 되살아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설날 정경[元日情景] / 고영화(高永和). 韻字 ‘先’

兒童歡笑喜新年 아동들은 웃고 떠들며 새해 맞아 기뻐하는데
笑我當時片刻姸 우스워라~ 나도 그 고운 시절 잠깐이었지.
全家幸亦俱無頉 온 가족이 다행하게 탈 없이 잘 있나니
祖子孫會迎今年 할아버지 아들 손자 모여 새해를 맞이한다.

得年未是人間慶 나이를 더함이 인간의 경사가 아니건만
賀客紛紛還空然 하객들 분분하여 도리어 쓸쓸하다.
三杯壽酒渾家樂 삼배의 축수 잔에 집안이 마냥 즐겁고
同閈爭相賀年年 온 마을이 서로 다투듯 새해를 축하한다.

揷花巫女舞翩翩 꽃 꽂은 무녀들이 훨훨 날듯 춤추고
靈旗獵獵祭祀船 신령한 깃발이 펄럭이는 선박에서 제사를 지낸다.
竹爆桃符辟鬼神 폭죽과 도부로 나쁜 귀신들이 도망가는데
臨汀賽皷鬧新年 물가에서는 북치고 굿을 하니 새해가 부산하다.

香烟正繞金鑪上 향 연기가 쇠 화로 위에서 감싸 돌때
辛福安寧祈願偏 행복과 안녕을 오로지 기원 드리네.
靑山有約終須到 청산에 약속 있어 끝내 가야 하지만
海上狂歌樂聖天 해상의 태평성대 미친 듯 노래하리라.

[주] 폭죽과 도부(桃符) : 섣달 그믐날 밤과 새해 아침에 폭죽을 터뜨리면 질병을 옮기는 악귀가 그 소리를 듣고 달아난다고 하였다. 도부(桃符) 복숭아나무에 귀신을 쫓는 신의 이름이나 상을 그려 복을 비는 것이다.

2) 설날, "선부군(先府君, 남의 부친 별세 후에 부르는 존칭)이 우거했던 설날" 시운을 공경히 차운하여.
[元日敬次先府君僑居元日詩韻] / 김진규(金鎭圭)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배소에서. 韻字 ‘先’

謫裡新正至 귀양살이 새해 첫날에
羇心劇愴然 나그네 마음 몹시 서글퍼진다.
孤懷偏惜日 외롭고 쓸쓸한 생각에 한편으론 가는 날이 아깝고
愁鬢耐添年 시름 섞인 흰머리 견디며, 나이 한살 더하네.
戀母腸堪絶 어머니 그리워 애간장만 끊으며
朝天夢幾懸 그리운 꿈에서 몇 번이나 매달렸다.
危踪愧枯草 위태한 발자취가 부끄러운데 시든 풀은
春返獨難姸 돌아 온 봄에 홀로 어여쁘길 꺼리는가?

3) 1692년 음력 1월1일[壬申元日] 이날 집에 편지를 썼다(是日作家書) / 김진규(金鎭圭) 거제시 거제면 배소에서. 韻字 ‘灰’

年年元日共愁來 해마다 새해에는 모두가 근심이 있다
欝欝孤懷豈易裁 답답하며 외롭고 쓸쓸한 생각에 어찌 쉽게 결단할까
徂歲秪能添鬢雪 세월가도 때마침 할 수 있는데도 흰머리만 더하고
新春猶未暖心灰 새해에는 마음이 의기소침하여 아직도 따뜻해지지 않구나
炎洲氣與東風動 더운 남녘땅의 날씨와 더불어 동풍을 일으키는 건
故國書隨北斗廻 옛 나라 기록에 따르면 북두칠성이 돌아서라네.
還恠流光唯不棄 비록 버리지 못하더라도 빛이 널리 퍼져 괴이하게 돌아오지만
窮荒千里屢相催 천리가 궁벽하니 자주 서로 재촉하구나

4) 겨울밤[冬夜] / 김진규(金鎭圭)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배소에서.

歲暮宵方永 세모의 밤은 과연 길구나
愁多夢亦驚 근심이 많아 꿈꾸다 놀라는데
暗窓時自響 어두운 창은 때마다 울리고
風雨送寒聲 비바람에 오싹한 소리 알리네

海風吹破窓 해풍 불어 창문이 째지고
山雨灑叢竹 산비는 대숲에 뿌린다
長夜何時晨 기나긴 밤 언제 새벽을 알리려는지
寒衾獨自宿 겨울 이불로 나 혼자 잔다네

5) 세모에 비는 내리고[歲暮雨中] / 김진규(金鎭圭) 거제시 거제면 배소에서.

歲暮茅簷下 세모에 초가 집 처마 아래
蕭蕭寒雨滴 쓸쓸한 겨울비가 떨어진다.
寒暑時紛換 겨울과 여름철이 어지러이 바뀌듯,
榮枯心已寂 번영과 쇠락도 마음에선 이미 고요하다.
身同酒爲偶 몸은 술과 함께 벗이 되니
病與書成癖 병과 더불어 글씨가 습관이 되었다.
世事旣相間 세상일은 이미 멀어지고
幽居漸自適 궁벽한 삶에서 점차 만족하며 즐기게 되는구나.
虗窓俯前浦 창문 틈으로 앞 바닷가를 보니
暮潮送暝色 저녁 밀물타고 해질녘 황혼빛 보내온다.
可憐波上鷗 가련하도다, 물결 위의 갈매기여
炯炯暗中白 어스름 황혼 속에 흰빛 반짝인다.

6) 새해에 숙부(김만중), 사촌맏형, 사촌아우 정씨누이가 생각나[新年憶叔父伯氏瑞弟鄭氏妹] / 김진규(金鎭圭) 거제시 거제면 배소에서. ‘陽’

一別成三歲 한 번의 이별로 3년 동안
諸親散四方 여러 친척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露梁書阻絶 노량(남해의 숙부 김만중)과 편지가 끊어지고
瀛島路微茫 영도(제주도)로 가는 길도 아득하네.
行坐吟空苦 앉으나 서나 괴로워 쓸데없이 읊조리며,
嬋媛詈可忘 아리따운 여인(부인)을 잊을까 자책한다네.
飄淪思骨肉 멀리 나부껴 떨어진 골육들 생각나니
愁寂斷心腸 시름겨운 적막함에 마음이 몹시도 아프네.

7) "두 분의 손님(최명식,최재규)과 달밤에" 차운하여[次二客 崔明植,崔在奎 月夜韻 戊申] / 1848년 무신년 조병현(趙秉鉉). 거제면 동상리에서. ‘寒‘

經冬經歲地無寒 한해가 지나 겨울이 가고 대지에 추위가 사라지니
種麥鋤蔬土俗安 이 지방(거제) 풍습에 따라 보리밭에 풀을 메네.
病裡幾何元夜月 병중이라, 대보름 달 어떠한지?
明光應是舊時團 옛날에는 둥글고 밝은 빛이었는데.

枳籬如壁復如墻 벽 같은 탱자나무 울타리 담장되어 둘러싸고
墻外人民各美庄 담 밖의 백성들은 제각기 아름답고 씩씩하다
箇箇新衣新歲祝 한사람 한사람 새 옷 입고 신년을 축하 하고
臨汀賽皷徹宵長 물가에서는 북치며 굿을 하면서 길고 긴, 밤을 샌다네.

별신제(別神祭)라고도 하는 별신굿은 마을 공동으로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을 제사하는 점에서는 동제(洞祭)와 유사하지만, 동제는 동민 중에서 제사를 주관하고, 별신제는 무당(巫堂)이 주재하는 점에서 다르다.

남해안별신굿(南海岸別神)주로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에 행하는데, 보통 마을회관에서 제물을 차린다. 각 가정에서 한 상씩 차려와 문 밖에 늘어놓는 거래상(退鬼床)이 특이하다. 굿거리에서 무녀는 부채와 무령(신방울),신칼,손대 등을 일률적으로 사용하고, 악기는 악사 셋이서 각각 장구,징,꽹과리를 잡아 사용한다. 그러나 이따금 북을 사용하기도 하고, 특히 굿의 시작과 끝 무렵에는 대금만을 사용했다. 마을에 따라 당산굿(당맞이굿), 용왕굿, 지신밟기 등을 올리기도 했으며, 어촌마을에는 어선을 모아놓고 풍어제를 올렸다.  또한 마을 어귀마다 대나무 두 개를 세워 위쪽을 새끼줄로 연결해서 마을에 들어오는 악귀를 막고 간단한 제를 올렸다.

◯ 1881년 이유원(李裕元) 영의정이 거제시 거제면의 설 전날(섣달 그믐날) 거제민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동방의 풍속에는 사람 사이에 멀고 가까움이 없어, 떡 치는 마을 집마다 설맞이 한다네.”[東方風俗無遐邇 打餠邨家餙歲初]

거제부사는 거제향교와 재군(읍치소) 서쪽 5리, 외간마을 사이에 있는 사직단(社稷壇, 사단社壇)에서 토지 신과 오곡(五穀) 신께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고, 뱃사람들은 신당(神堂)이나 공수서(公水嶼)에서 마을의 안녕을 위해 바다 신께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 새해 아침에 뜨는 일출(日出)을 보기위해, 우리 이웃들은 먼 곳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출명소로 향한다. 이는 희망과 소망, 출발을 알리는 우리 가슴에 설렘 가득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해 돋는 아침 해는 희망과 소망을 기원케 하며 드넓은 바다를 보면서 미래의 무한한 꿈을 키우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우리 고유 명절인 설날을 없애기 위해 음력 설날을 구정(舊正)이라 부르고 양력 1월1일을 신정(新正)이라 부르면서 수난사가 시작됐다. 설 명절을 없애기 위해 구정 일 주일 전부터 총독부가 전국 떡 방앗간 가동 중지를 지시할 정도였다니 설날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착을 알 만하다.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 단기(檀紀)를 사용하면서 다시 제 분위기를 찾긴 했으나 공식 휴일로 지정되진 못했다. 그러나 추석과 더불어 2대 명절로 자라잡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공휴일로 지정돼야한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됐지만 ‘이중 과세’ 문제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특히 당시 정부가 수출주도 국가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정에 하루 쉬고 구정엔 정상근무를 했다. 그 후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음력 설날은 한 때 ‘민속의 날’이란 명칭을 얻기도 했다. 정부가 설날을 완전한 민족 명절로 인정해 음력 1월1일을 전후로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1989년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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