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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거제 구리광산을 손에 넣어라!
(6)거제 구리광산을 손에 넣어라!
  • 전갑생 시민기자
  • 승인 2015.02.21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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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거제 근현대사 100선> 여섯번째 이야기

“거제지역에서 구리가 생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리가 나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생산된 것이다.”(《헌종실록》 권 14, 재위 9년(1668) 1월 19일 무오)

“영국인의 거제구리광산 허가를 막아라!”(일본 외무대신)

지금으로부터 약 347년 전 조선에서 처음 구리가 생산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간직한 곳이 바로 거제도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 동안 거제 구리광산은 조선 경제의 보탬을 줬다. 물론 그 광산에서 일한 거제 광부들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 232년이 지난 1900년 3월부터 영국과 일본 양국은 거제구리 광산을 놓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거제 유일의 구리광산이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넘어갈 위기를 맞았다.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다소 복잡한 국제정세와 내부 여러 사건이 겹쳐 일어난 거제 구리광산 탈취사건.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 역사적 배경과 사건 내막이 무엇인지 추적해보자.

▲ 메이지(明治)시기 일본인이 운영하던 광산 모습.

복잡한 동아시아 쟁탈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해(을미사변) 사건과 러시아공사관 피신(아관파천), 광무개혁 등을 단행했으나 내부의 친일세력 득세를 막을 순 없었다. 그는 대국 청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했으나 동아시아에 진출한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횡포와 불평등조약 등을 감내해야 했다.

남의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은 갑오농민전쟁과 일제의 폭력성을 불러오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농민군들은 일본군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영국, 미국과의 외교력을 강화하고 중국의 의화단운동에 적극 개입하여 ‘극동의 헌병’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영국, 러시아, 미국 등 구미 열강들은 한국의 철도, 광산, 삼림 등 중요한 자원을 빼앗는 데 경쟁적으로 달라붙었다. 러시아는 마산포 내의 조차지 확보에 나서다 일제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에 압박해 ‘거제도 양여(讓與)’ 밀약을 추진했으나 또 다시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영국은 거제도 일대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어장과 광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또 놀란 일제는 영국 군함 뒤를 쫓아다니면서 방해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노린 곳은 거제도 구리광산이었다.

▲ 1900년 5월과 6월 사이 거제지역의 광산은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상세히 표시했다. 산의 모양과 나무, 각 마을의 집까지 비교적 자세히 그려 넣었다.

욕심 많은 두 늑대의 싸움

1900년 3월 26일 오후 6시 40분 주한 일본공사관 하야시 곤스케(林 權助)공사가 본국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蔵)에게 급하게 무전을 친다.

“영국 공사가 말하길 ‘영국인이 거제도 구리광산 채굴권을 얻고자 바라고 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사람(일본인) 중 채굴을 희망하는 자가 있다면 영국인 쪽을 그만두게 하도록 상담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위의 영국인이 거제 구리광산 채굴권을 가지려 하자, 일제는 재한 일본인을 내세워 미리 선점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보면 러시아가 마산포와 거제도에 조차지 계약에 나려하자, 일제는 거제광산과 같은 방식을 이용했다. 일제는 거제도가 ‘자기 땅’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하야시는 1900년 4월 5일 아오키 외무대신에게 다시 영국인의 상세 정보를 보낸다.

“거제도 구리광산(銅鑛山) 채굴권을 얻으려고 기도하는 영국인은 양자강(揚子江) 신디케이트의 대표자로, 한두 달 전 영국 공사에게 출원한 모양입니다. 지금 사정에서 쉽게 한국 조정에 신청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 곳에 광맥(銅脈)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 건너 온 마쓰이 물산회사(三井物産會社) 기사가 마산포 체재 중에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며칠 후인 4월 9일 하야시는 “거제에는 구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 본인은 작년 9월에 김태원(金泰元)이 농상공부(農商工部)로부터 그 섬의 구리광산 개발 허가를 받았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고 다시금 아오기 외무대신에게 회신한다.

하야시는 “10월에 김태원과 경성에 거주하는 야마자키(山崎堂太郞) 사이에 그 광산의 공동 개발을 위한 계약이 체결되었고, 김태원은 사사키(佐佐友房)의 동생의 제의로 위의 허가를 취득했다”고 덧붙였다. 하야시는 “우리가 이 계약으로 개발에 착수할 수 있으나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영국인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신청을 철회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구리광산을 놓고 영국과 신경전을 벌이던 일본은 현지에 기술자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1900년 5월 2일 오후4시 마산영사 노세(能勢)는 하야시 공사에게 “거제도에서 동(銅)을 탐정하기 위하여 기사를 파견한다”며 “그곳 거류민 중에 토지의 정황에 정통하고 비밀을 지킬 만한 적당한 자를 찾지 못했으므로 차라리 카와카미(川上) 서기생이 함께 가는 것이 편의하겠다는 데 쌍방이 동의했으며, 공사께서 대신에게 상신하여 속히 명령 바란다”고 말했다.

거제 구리광산을 탐사할 기사 일행도 2일 고베(神戶)를 출발했다고 함께 전했다. 같은 날, 밤 9시 35분 하야시 공사는 본국에 “거제도의 동광 정탐과 관련하여 파견되는 기사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부산에 있는 카와카미(川上) 서기생을 그 섬에 출장시키는 건은 속히 전보로 직접 명령하시기 바란다”고 아오이 외무대신에게 전보를 쳤다.

▲ ‘거제도 순회선로 약도’. 1900년 5월 작성된 거제약도다. 이 지도에는 유호(유포), 하청, 대금산, 천곡, 덕포, 묵포, 문곡(문동), 구천동 등의 광산을 표시하고 있다.
▲ 1900년도 거제광산에서 사용한 각종 도구들. 왼쪽부터 두레박 모양의 급수기, 낫 모양의 채굴도구, 금은광석을 구별하는 그릇, 망치, 목침(크고 작은 것) 등이다.

일제, 거제광산들 탐사대 보내

마산 영사는 카와카미를 거제도로 보내지만 “거제도에 구리 광산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다음날 하야시 공사에게 전보를 보낸다. 그러나 5월 5일 고베에서 출발한 기사들이 도착하고 바로 거제도로 이동한다. 일행은 거제도에 도착하여 광산 위치를 찾아 나섰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5월 21일 오후 1시 노세 영사의 후임인 사카다(坂田重次郞) 마산영사가 하야시 공사에게 거제도의 구리광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서를 올렸다.

사카다 영사는 “이 섬에는 다소의 광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 희망이 없고, 구리광산 같은 것은 거의 없다”고 보고한다. 거제도 주요 광산은 연초면 천곡리, 하청면 묵포(墨浦, 먹개), 동부면 구천동, 이운면 덕포리, 장목면 대금산·유포(柳浦, 지금의 유호리), 일운면 문곡(門谷, 지금의 문동리)·삼거리 등지였다.

천곡은 유화철로 그 속에 극히 소량의 구리를 함유하나 동분은 거의 없었다. 묵포도 역시 주로 유화철로 해안에 운모 철광이 포함된 석영맥(石英脈)을 확인했는데 금분(金分)을 함유했는지도 알 수 없다. 구천동은 동분이 있음을 확인하지 못하고, 다만 석영맥이 있음을 발견할 뿐이다고 했다. 덕포는 화산암의 균열에 폭 1촌 정도의 유화철이 있을 뿐이고, 대금산은 석영의 맥이 있을 뿐이며, 유포는 소량의 유화철이 확인되지만 거의 광맥이 아니고 또한 바다 가운데 이어서 작업 불가능하고, 문곡과 삼거리 등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천곡, 묵포, 덕포의 채굴권은 밀양의 손진환(孫振煥)과 경성평리원 판사 이인영(李寅榮)이 공동 명의로 1899년 3월부터 한국정부로부터 거제도 전역의 채굴 권리를 획득하여 6백관 정도를 상납했다고 한다. 현재는 묵포와 덕포는 휴광하고, 천곡만 채굴 중이나 채산이 맞지 않아 휴업 중이라고 했다. 1900년 6월 16일 광산감독관과 농상무기수 두 명은 농상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하청면의 두 곳은 채굴이 가능하다”라고 보고한다. 그 뒤 마산포 거류지 아마노 엔조(天野榮造)는 1907년 10월 7일 하청면 천곡(면적 59㎡)에 구리와 은광 채굴권을 허가받았다.

▲ 거제도 광산 소재지 약도.

속셈은 딴 곳에

큰 소득없이 끝난 거제광산 쟁탈전은 일제의 꼼수와 방해로 승기를 잡았다. 이 내용을 본 혹자는 ‘별로 얻은 게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큰 오산이다. 일제가 작성 「거제 광산 보고서」와 「거제광산 출장복명서」(1900년 5·6월)에는 거제 광산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목적을 담고 있다. 광산조사에 나선 하청, 장목 대금산 일대, 동부 구천동 일대는 훗날 일본 해군의 근거지 통신대 및 감시소 등이 들어선 곳이다. 1903년 송진포를 비롯한 장목·하청·연초·동부·이운면 일대는 진해방비대(1912년 송진포→진해로 이동)의 군용지였다.

왜, 일제가 거제도에 애착을 갖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러시아나 영국은 거제도 양여와 광산 채굴권에 큰 공을 들렸다. 하지만 매번 두 나라는 일제의 ‘꼼수’에 물을 먹은 셈이다.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 식민지 확장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국. 그러나 일제는 영국을 달래고 러시아와 한 판 붙는다. 러·일전쟁은 거제도 양여 문제에서 시작된 앙갚음일지도 모른다. 이에 일제는 거제도 전역을 군사기지 시설로서 활용한다.

 


전갑생 시민기자는 거제 출신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했고, 현재는 방송통신대학교 외래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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