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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의 윤리를 ‘선비정신’에서 찾다
공직자의 윤리를 ‘선비정신’에서 찾다
  • 거제뉴스광장1
  • 승인 2015.02.2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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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

[번역문]

이후백(李後白)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으니 정사가 볼 만하였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찾아와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일가 사람이 찾아왔는데, 말을 나누던 차에 관직을 구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후백이 안색을 바꾸고 사람들의 성명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이었으며 일가 사람의 이름도 기록 안에 들어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 이름을 기록하여 후보자로 추천하려고 했었네. 그런데 지금 그대가 관직을 구한다는 말을 하니, 만약 구한 자가 얻게 된다면 그것은 공정한 도리가 아닐세. 참으로 애석하네만,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네.”

하니, 그 사람이 대단히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이후백은 관직 하나를 제수할 때면 매번 벼슬할만한 적임자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폭넓게 물었으며,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제수했을 경우에는 번번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가 나랏일을 그르쳤구나”라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여론이 이후백의 공정한 마음은 근세에 비할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원문]

後白爲銓長, 務崇公論, 不受請託, 政事可觀. 雖親舊, 若頻往候之, 則深以爲不韙. 一日, 有族人往見, 語次示求官之意. 後白變色, 示以一小冊子, 多記人姓名, 將以除官者也; 其族人姓名, 亦在錄中. 後白曰: “吾錄子名, 將以擬望. 今子有求官之語, 若求者得之, 則非公道也. 惜乎! 子若不言, 可以得官矣.” 其人大慙而退. 後白每除一官, 必遍問其人可仕與否, 若誤除不合之人, 則輒終夜不眠曰: “我誤國事.” 時論以“後白之公心, 近世無比.”
 
- 이이(李珥, 1536~1584),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전서(栗谷全書)』 제30권

[해설] 

위의 일화는 명종과 선조 연간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인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이 이조 판서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전조(銓曹)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이조와 병조를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담당한 곳인 만큼 사적인 청탁이 없을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 어디보다도 공평무사한 덕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공평무사함이란 사사로운 이익에 이끌려서는 안 되니, 몸에 밴 공손함과 검소한 성품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후백이 이조 판서라는 막강한 지위에서 이처럼 사심을 배제하고 공정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부귀와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철저히 선비정신을 완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공직을 맡아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청고(淸苦)함을 지키니,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렀어도 빈한하고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고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아 손님이 와도 밥상이 초라하였다고 하니, 청백리로 선정된 이유를 알 만하다.

한번은 명종에게 “검소하면 씀씀이가 자연 번다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임금이 한 번 부국(富國)에 뜻을 두면 세금을 거두는 신하가 으레 먼저 자신의 사욕을 채울 것이니,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고 부국에 성심을 다할 자가 또한 몇이나 되겠습니까?”라고 아뢰어 임금이 솔선하여 검소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모습에서 이후백과 같은 청렴함과 공평무사함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이나 부를 이루기 위해 온갖 허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허언임이 밝혀지고 비리가 드러나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실수였다”, “잘 몰랐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경제 발전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할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성과지상주의로 치닫다보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정의 모든 어두운 면이 미화되고 심지어 이를 숭배하는 집단도 생겨날 정도로 우리 주변은 공직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성과만을 중요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는 유명한 희곡의 제목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유가(儒家)의 선비정신을 근간으로 하여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 매우 탄탄하고 유례없는 긴 역사를 이룩한 국가였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구한말을 거쳐 국권을 상실하는 아픈 시기를 겪었고, 해방 후 미 군정 시대와 전쟁, 그리고 잘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을 지내왔다.

그동안 우리는 쇠퇴의 원인을 유가의 선비정신에 떠넘겨, 낡고 고루한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동시에 그 역사까지도 외면해 버렸다. 이는 우리가 유가의 선비정신을 내면 깊숙이 들여다 보지 못하고 겉으로 표출되었던 일부 부정적인 외형만을 가지고 그것이 선비정신의 모든 것인 양 평가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유가의 선비정신은 의(義)를 실현하고 지조를 지키는 꼿꼿함이라든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위용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바탕에는 공손함과 검소함이 있다. 공손함과 검소함이 몸에 밴 사람은 남을 존중할 줄 알며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맹자는 선비를 두고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라고 하였으며, 또한 “공손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의 것을 탈취하지 않는다.[恭者不侮人, 儉者不奪人]”라고 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후백이 지켰던 선비정신의 일면을 통해 과연 어떤 가치를 추구해나갈 것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선비정신의 바탕에 깔린 공손함과 검소함을 중요 덕목으로 삼아 자기 성찰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글쓴이 : 선종순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전주분원 전문위원
주요 역서
- 『심리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조선왕조실록 번역 및 재번역 사업 참여 
- 『국역 기언』 제2책,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종묘의궤』,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사가집』 제13책, 한국고전번역원, 2009 외 다수

 

-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허가를 얻어 <거제뉴스광장>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  ‘고전산문’ 코너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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