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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포 일본해군방비대' 설치와 전쟁의 시작
'송진포 일본해군방비대' 설치와 전쟁의 시작
  • 전갑생 시민기자
  • 승인 2015.03.1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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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거제 근현대사 100선> 일곱 번째 이야기

한국, “중립국에서 동양평화론으로”
일본, “러시아 다음은 만주와 유럽...한국은 덤이다.”
러시아, “전쟁과 혁명의 시대 도래”
미국·영국, “그 위험하고 어려운 사업이었다.”

레닌은 “20세기는 사실상 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이를 반증하듯 19세기 말부터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청-영국, 크림전쟁, 미국 남북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청일전쟁 등이다. 유럽의 제국들은 아시아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20세기 첫 국제전은 러·일 전쟁이었다.

독일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레닌이 예견한 대로 “20세기는 전쟁과 혁명 그리고 폭력의 세기”라고 단언했다. 전쟁의 광풍은 유럽과 북미에서 아시아로 옮겨져 더 큰 화를 부르고 있었다. '유럽제국의 중심축'이라고 자랑한 러시아 제국은 ‘종이호랑이’가 되고 말았다. 이 충격파는 전 유럽과 아메리카에 전해졌다.

옥스퍼드 교수 제프리 주크스(Geoffrey Jukes)는 “러·일 전쟁에서 여러 유럽 제국주의 권력 가운데 첫 패배를 보았다”라고 평가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에게 그 충격은 새로운 전쟁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그 여파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러시아의 풍자그림. 러시아는 그림처럼 일제와의 해전에서 승리하리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발틱 함대는 패배하고 말았다.
1904년 프랑스 풍자만화가 비앙코(T. Bianco)가 그린 러·일전쟁 풍자그림. 메이지 일왕이 흰 곰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다. 흰 곰은 ‘대한제국(COREE)’과 만주(MANDCHOURIE)’을 상징한다. 좌측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루즈벨트, 영국, 러시아, 프랑스도 함께 지켜보고 있다. 특히 관중은 대부분 청나라 사람들이다.

거제도, 제국주의 전쟁 중심에 놓이다

일제는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와 만주 침략 교두보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러시아는 마산포·거제도 조차를 놓고 일본의 방해로 여러 번 물을 먹었다. 여기서부터 힘의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 그 사이 한국 대신들은 친러-친일파로 양분된 상태에서 ‘동양평화’라는 명분을 찾고자 일제에 기울고 있었다.

일제는 거제도 광산뿐만 아니라 남해안 일대의 군사기지 설치라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은 대외적으로 중립국이라고 표방했으나 내부 권력자들에 의해 일제 군사기지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게 거제도 ‘송진포 가근거지 방비대’(훗날 진해요새사령부)였다.

1903년 12월 28일 일제는 ‘1903년도 가근거지 방어계획(假根據地 防禦計劃)’이라는 작전을 수립하고, 진해만과 거제도 일대에 ‘가근거지방비준비대(假根據地防備準備隊)’와 ‘진해방비대(鎭海防備隊)’를 파견해 기지 건설에 나섰다. 1차 준비대 13명의 병사가 후쿠오카(福岡)에서 거제도로 출발했다. 이들 임무는 거제도에 포대, 통신소, 신호소 외 각종 막사 등을 건설하는 데 있었다. 방비대의 작전지역은 1903년도 전시편제에 따라 북쪽 진해만에서 남쪽 거제면 죽림포(竹林浦)·한산도까지 설정했다.

일본해군의 기지건설 계획은 진해만, 죽림포, 한산만 등지에 포대, 병사, 수력발전소, 전등, 발전소 등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앞서 일제는 한국정부의 허락없이 거제군 장목·하청·연초·동부면에 토지 매입 협상 이전부터 군사기지 예정지에 시설물 건축 자재 및 주요 함정(56척) 등을 이동시켰다. 대본영은 후쿠오카 사세보(佐世保) 진수부에서 인부 약 300명을 여러 차례 나눠 기지 건설에 동원시켰다.

1903년 12월부터 시작된 공사 지점은 송진포-하청-칠천도-고현성-가도조로 이어지는 본 방어선, 거제도 북단 소고도(小高島, 지금의 창원시 마산 구산면)-잠도(구영 맞은편)-거제 장목 구영 방어선, 가덕도-저도-장목 하유·농소·관포로 이어지는 제1방어선, 견내량-한산도-쌍근-율포-가배-가라산 등으로 이어지는 제2방어선이다.

구영등(옛 영등성, 지금의 구영)에는 발전기소 1개소, 산성 쪽에 전등 1개를 설치했다. 죽림포 부근에는 율포만-봉암도 동단-쌍근 사이에 부표 수력발전기 2개선을 부설한다. 쌍근에는 수력발전기소 1개소를 별도로 설치하고 수뢰 부설에 들어갔다. 거제도의 북동쪽 백서도(白嶼島) 부근 해면에 해저수력발전기 14개, 부표 7개를 부설하고 관포에 수력발전소를 추가로 설치한다. 통신시설물들은 주요 산 정상에 설치하고 쓰시마와 연결된 해저전선과 이어졌다. 가라산 정상의 무선전신소는 일본군 함선과 통신 외에도 쓰시마 기지와 연결되었다.

1904년 송진포 가근거지 방비대 각 가설물 위치 약도. 송진포 방비대 사령부 부지는 전체 2,990평에 달했다.
1904년 진해만구 방어방면 통신계획약도. 이 통신망은 가덕도와 거제도 송진포까지 이어져 있었다.

송진포, 진해만요새 사령부 설치

1904년 2월 1일 해군사령부는 3척의 함선을 진해만에 파견하고 별도의 신호소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추가로 설치된 신호소는 거제도 대금산, 계룡산 등에 각각 1개소씩 설치해 죽림포의 신호연락을 했다. 2월 6일 오후3시 일본해군 중좌 나카가와(中川重光) 외 3명은 계룡산 신호소를 설치하기 위해 고현만으로 들어와 측량하고, 대금산 신호소와 칠천도, 죽림포 등지의 시계 확보 및 남서쪽 해상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2월 7일 오후 1시반 다카하시(高橋海門) 함장 등이 대금산과 칠천도 신호소에 소위와 하사 각각 1명, 신호병과 수병 3명을 데리고 각종 막사를 건설 감독했다. 죽림포 부근 죽도(竹島)와 오수리에 13개의 부표를 설치한다. 이렇게 일본 해군은 거제도 곳곳에 군사시설물 설치를 완료하자 대규모 군대를 거제도에 파견시킨다. 1904년 2월 6일 오후1시 제6정찰대 외 29개 부대가 송진포 사령부에 들어왔다.

1904년 2월 20일 준비대는 ‘가근거지 방비대’로 개편되고 8월 12일 장목면 송진포에 해군 가(假)근거지 방비대가 설치되었다. 방비대는 좌세보진수부(佐世保鎭守府)에 속했으며, 소재지(진해만)의 항만과 부근 일대의 해면․해안 방비 및 경호를 임무로 삼았다. 사령관․참모․부관․분대장․기관장․군 의장․주계장(主計長) 외에 해군 병조장(兵曺長)이하 사졸이 방비대를 구성했다.

당시 군병력은 3천여 명이고 병사 등의 시설도 갖추었다. 기지 내에는 우편수취소, 해군용통신소, 진해만방비대사령부, 병사, 병실, 은치(銀治)공장, 화약고, 창고, 수답창고 등의 부대시설이 건축되었다. 방비대는 진해만요새사령부로 다시 개편되면서 12월 18일 가덕도로 이전했다. 3월 15일 진해만 일대, 5월 3일 죽림포만 일대, 5월 27일 통영만 일대의 수력발전소가 각각 완성되었다.

사령부의 설치 이전부터 제일 중요한 포대 설치는 북쪽과 남쪽 등에 집중 배치되었다. 포대는 관포포대(3. 29), 광이도 포대(4. 8), 앵도포대(4. 9), 실리도포대(4. 10), 소고도포대(4. 11), 한도수도포대(5. 13), 견내량포대(5. 28, 임진왜란 당시 왜성 터), 쌍근포대(5. 28), 한산항포대(6.7) 등이다. 신호소는 고현성(3. 7), 앵도(3. 31), 저도(5. 3), 가라산 무선전신소(5. 19), 한산도(5. 30), 가조도 옥녀봉(6. 4), 가조도(6. 4) 등이다. 전등은 앵도 심해(4. 18), 실리도심해(4. 19), 구영 부근 심해(4. 24), 광이도 부근 심해(5. 7) 등이다. 방재(防材)는 송진포항구(5. 16 칠천도 방재를 폐하고 5. 18 완성), 하청만 서구(2. 11 부설하여 5. 21 철거) 등이 있었다. 일본은 이렇게 거제도 곳곳에 군사시설물 설치가 완료되자, 5월 27일 일본 함선 10여 척을 진해만과 송진포 등지에 파견한다.

1905년 러·일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의 발틱함대 모습. 이 함대는 쓰시마 해전에서 침몰하고 만다.

소개 주민과 송진포 기념비

해군 제3 임시축성단(築城團)은 1904년 8월 가덕도와 저도에 상륙해 1905년 1월까지 포대(砲臺)공사를 완료했다. 그 이후 2개 중대 진해만 요새포병대대는 제1중대 저도, 제2중대 가덕도에 각각 배치된다. 1907년 2월 5일에 진해만방비대는 ‘진해만요새 포병대대’로 개칭, 보강되었다. 1907년 7월 27일~9월 13일 거제·통영 지역에 일제 장교와 장병들을 포함한 52명이 의병들을 ‘토벌’할 목적으로 주둔했다.

송진포의 군사 기지는 8년간 거제도 내 토지를 점유하면서 군사력을 증강 배치했다. 아울러 1910년에는 가덕도, 송진포, 저도 일대에 연습포대와 연병방, 사격장 등의 군 시설을 갖추었다. 1904년 송진포를 비롯한 장목면, 하청 및 연초 일대 민가와 사람들은 적은 돈을 받고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기지 폐쇄된 직후 다시 이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 해군성은 일본인 어업 이주민들에게 대부하고 말았다.

송진포방비대가 설치된 후 1911년 4월 1일, 쓰시마와 조선 연해 일대가 합쳐져서 제5해군구로 되면서, 진해만은 군항으로 지정되었고 송진포방비대는 ‘진해경비부 송진포해군사령부(鎭海警備部 松眞浦海軍司令部)’로 개편되었다. 이로부터 진해만에는 좌천리 신축 청사로 이전한 요새사령부 및 예하 증포병대대와 함께 해군 진해방비대가 주둔했다. 이후 1916년 4월 1일자로 진해경비부의 전신인 진해요항부가 설치되었고 송진포경비부는 ‘진해만요항부 송진포요항사령부(鎭海灣要港部 松眞浦要港司令部)’로 개편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진해와 송진포 일본인, 진해요새사령부 등은 진해 제황산과 송진포 등에 러일전승기념탑 건립에 나섰다. 1929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 승전일이자 일본 해군기념일을 맞아 지금의 진해 제황산공원에 ‘러일전쟁기념탑’을 건립하고, 1928년 9월 송진포 거주 일본인 등이 ‘국민적 사업’일환으로 진해와 동일한 기념탑을 건립운동을 펼친다.

1931년 5월 27일 송진포에서 도고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친필을 담은 탑 제막식을 열었다. 지금 거제시청에 보관된 탑 일부 비석은 도고의 친필이다. 중일전쟁 이후 해방직전까지 해군기념일마다 송진포 기념탑 아래서 대대적인 행사가 개최되었다. 특히 태평양전쟁 시기 전국의 초·중·고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대거 ‘성지순례’차원에서 송진포 기념탑을 방문하고 참배했다.

도고헤이하찌로의 친필. 도고는 1928년 송진포 일본해 해전기념탑 건립에 친필을 보냈다. 현재 거제시청에 보관 중인 비석은 하단 우측의 글이다.

110년이 지난 지금,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해 ‘침략전쟁이 아니다’라고 못 박고 있다. 일제의 ‘동양제패’라는 꿈은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를 넘어 태평양 전역까지 확장시켰다. 이런 야만의 시대에 동조한 제국주의 국가는 20세기 첫 전쟁에서 큰 이익을 챙겼다. 미·영국은 일제의 전쟁비용 14억 6천만엔 중 6억 9천 4백만 엔을 지원한 나라다.

미국은 전쟁의 중재자로 나서 포츠머스 평화회의를 주도하고 필리핀을 얻었다. 시어 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6년 노벨 평화상까지 받으면서 ‘동양평화를 이룬 세계적인 영웅’이라고 자처했다. 영국은 일제에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식민지 시스템을 제공한다. 대만, 한국 등지의 식민지 시스템은 영국의 식민지 시스템에서 나온 것이다.

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거제 등지에 군사기지 설치 및 종군 지원을 허용했다. 군사기지 설치에 도운 한국 관료들은 일본의 승리가 ‘동양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결국 을사늑약과 식민지라는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미·영·일-프랑스·독일·러시아 간의 대리전쟁이자 20세기 첫 국제전이었다.

평화조약 체결 이후 110년이 지난 지금의 동아시아는 여전히 영토분쟁(한·일, 러·일, 대만-중국)과 탈냉전(Post-Cold War)시대에 ‘새로운 냉전(New Cold War)’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변화는 일본의 헌법 제9조 수정과 맞물려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러일전쟁 중 숨은 지원자 미국이 한 세기를 넘어 다시 일본과의 군사적·정치적 동맹관계에서 재편을 꿈꾸고 있다.

(다음 편에는 '송진포 일본해전 기념탑'이 이어집니다.)
 


전갑생 시민기자는 거제 출신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했고, 현재는 방송통신대학교 외래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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