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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잉태한 빈곤의 정치
욕망이 잉태한 빈곤의 정치
  • 김용운 대표기자
  • 승인 2015.03.25 0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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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칼럼] 잃을 것은 잠깐의 자존심이지만 얻을 것은 민심입니다.

 

“학교는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하는 말은 대중에게 확 박히는 뭔가가 있어야 하나 봅니다. 홍준표 도지사가 한 이 말이 아마 오래토록 정치인 ‘어록’ 랭킹의 상위 순번에 위치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2004년 “불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라는 노회찬 식의 어록과는 달리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립니다.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지 웬 밥 타령이냐는, 철없는 아이 다루는 듯한 훈계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돈 안내고 밥 먹는다’는 것을 끝끝내 감추어야 하는 아이들, 아이가 둘이면 한달 10만원 이상을 가계부에서 덜어내야 하는 학부모들에 대한 눈곱 만큼의 미안한 마음도 없고 다독이는 내색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애 터지게 벌어서 꼬박꼬박 세금 낸 사람들이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수많은 사람들의 땀 냄새 배어있는 ‘신성한’ 돈다발이 왜 한 정치인의 쌈짓돈 취급을 받는 걸까요?

도지사의 생각이 그렇더라도 좀 제대로 챙겨보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도의원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같은 당이라고, 44대 7이 뭡니까? 의회는 민의의 전당이라면서요? 도민의 60%가 아이들 식판을 그대로 두라는데 기어코 그걸 빼앗는 도지사의 생각을 충실히 따른 도의원이란 사람들이 40%도 아니고 딱 두 배인 80%라는 걸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도의회는 이제 ‘민의’ 대신 ‘홍의’가 지배하는 곳이 돼 버렸습니다.

정 돈이 없다면 이해해야지 어쩌겠습니까. 근데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2009년 거창에서 시작돼 2011년부터 경남 전역에서 그동안 시행해 오던 무상급식비는 경남도비 257억원과 시·군비 386억원 해서 모두 643억원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 돈을 하루 아침에 ‘서민자녀 교육지원비’로 바꿨습니다. 1년에 한 명당 50만원 정도의 쿠폰을 줘서 이걸로 이비에스(EBS)교재도 사게 하고, 학원수강료로 내게 할 심산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입니다. 경상남도가 10일 경남 주요 일간지 1면에 5단 통으로 낸 광고문구입니다. 그리고는 “경상남도와 18개 전 시·군은 그동안 무차별적인 부자 무상급식에 지원하던 예산 전액을 전국 최초로 서민자녀를 위한 교육사업에 지원하여 서민자녀에게도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합니다”라고 친절하게 그 취지를 설명해 놓았습니다.

말을 갖다 붙혀도 제대로 갖다 붙여야지, 지금 우리 사회가 1년에 50만원 지원해 준다고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입니까? 우리 아이들이 그동안 먹던 점심이 부자라서 준 겁니까? 고단한 살림살이에 한숨과 짜증만 늘어나고 남편만 들들 볶아 대는데 그동안 부자 취급을 해 준 것 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판입니다. 경상남도 18개 시·군이 동의했습니까? 아,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시장, 군수가 도지사 앞에서 ‘난 반댈세’ 이럴 수는 없을 테니까요. 도비 한 푼이라도 더 따내려는 자치단체장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한 학부모 말마따나 ‘슈퍼갑질’입니다. 말장난이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경상남도가 3월 10일 경남 주요 일간지 1면에 5단 통광고로 실었습니다.

“나도 애가 둘이다. 월급 5% 삭감된 것과 같다.” 도의회 앞을 지키던 한 경찰이 말했다고 <시사인>이 전했습니다. “엄마 학원 끊고 밥값 내면 안 돼?” 한 학부모가 울면서 딸 아이의 말을 전했다고 <경남도민일보>가 전합니다. 이것이 도지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도민 다수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24일, <제주의 소리>에 따르면 제주도는 읍면에 사는 중학생에게 올해부터 1인당 30만원 상당의 수학여행비를 지급합니다. 한쪽은 식판을 뺏고, 한쪽은 여행경비를 대신 내줍니다. 제주도가 경남보다 잘 살아서 일까요?

돈 없는 경상남도의 지사는 왜 서울가는 1시간짜리 비행기를 타면서 비즈니스석을 타야만 하나요? 왜 비즈니스하러 미국까지 가서는 평일에 40만원짜리 골프를 치시나요? 도민이 속상하고 화나는 것은 바로 그런 겁니다. 2천5백원 하던 담뱃값이 4천5백원으로 올랐을 때 끊을 수 ‘밖에 없는’ 진짜 가난한 경남도민들이 좀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을 보여 주셔야지요.

홍 지사가 3년 전 보궐선거와 작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때는 무상급식 계속하겠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무상급식 예산이 없어진 것도 아니니 결국은 소신과 철학이 뒤바뀌었거나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신이나 철학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지목합니다. 그를 지켜본 많은 기자들이 평하길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 욕망을 이뤄가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그의 꿈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통령입니다. 그가 당내에서 주류가 되어 꿈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평소 계파 같은 걸 두거나 관리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은 참 좋은데, 이제 와 보니 당내 '투쟁'에서는 이길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필요한 것은 '국민적 지지'입니다. 과거 검사시절, 노량진수산시장 비리를 파헤쳐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을 구속시키고, 한때는 모래검사로 이름을 날릴 때 그가 대중과 여론에 호소하는 전략을 써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가 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얽히고 설킨 당내 서열구조를 깨부수든지 아니면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한 방’이 있어야 할 겁니다.

많은 평론가들과 사람들은 ‘무상급식 중단’이 그 ‘한 방’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확 띌만한 것인 건 맞습니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무상급식을 없앤 건 경남도가 유일하니까요. 어차피 진보나 개혁성향의 국민들은 지지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보수 결집을 노리는 건 괜찮은 수로 보입니다. 어차피 필요한 건 보수 진영에서의 1등이지 않겠습니까?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반대’를 내걸며 한때 보수의 아이콘이 된 적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 밥그릇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단은 성공한 듯 보입니다. 전국적인 관심 인물이 되었고,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알아주는 사람도 많습니다. 대권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야당 대표가 자신의 집무실을 찾아 오도록 만들기도 했구요. 하지만 좀처럼 대권후보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아마도, 말하기 좋아하는 이른바 ‘공짜밥’에 대해서는 이미 대다수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이 가중되는 현실에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더 크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도 아니면 부모의 돈이 좀 있고 없음에 따라 아이들의 밥그릇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정치는 때때로 한 수 물리기도 합니다. 최상의 수로 보았던 ‘신의 한 수’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었을 때, 내기바둑에서 물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다릅니다. 항상, 옳은 것만,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니구나’라고 여겨질 때, 한 발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이 두 발 앞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홍 지사가 그런 마음으로 미국에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지나고 보니 생각 못한 부분이 있었다. 도민 여러분의 뜻을 존중하겠다.” 이 얼마나 훌륭한 명분이 되겠습니까? 그것이야 말로 도청 현관에 새겨진, 늘 강조하는 ‘당당함’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요? 잃을 것은 잠깐의 자존심이지만 얻을 것은 민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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