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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의 재발견
동의보감의 재발견
  • 거제뉴스광장
  • 승인 2015.11.1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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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우리 소경대왕*께서는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뭇사람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을 베푸는 데에 미루어서 의학에 마음을 두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다. 일찍이 병신년(1596, 선조29)에 태의 허준을 불러 다음과 같이 하교하셨다.

“근래 중국의 의약서를 보니 모두 대충 뽑아 엮은 것들이라 평범하고 자질구레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 그대가 여러 의약서를 두루 모아 하나의 책을 편집하도록 하라. 그리고 사람의 질병은 모두 조섭을 잘하지 못한 데서 생기니, 몸을 닦고 기르는 것이 먼저이고 약물과 침은 그다음이다. 여러 의약서는 매우 방대하고 번잡하니 요점을 골라내는 데 힘써야 한다. 궁벽 진 시골 마을에는 의술과 약이 없어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토산 약품이 많이 생산되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그대는 약초를 분류하면서 토산 약품의 이름까지 함께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허준이 물러나 유의 정작과 태의 양예수ㆍ김응탁ㆍ이명원ㆍ정예남 등과 더불어 담당 국(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니, 중요한 내용이 대략 갖추어졌다.

*소경대왕 : 선조 임금으로, 소경(昭敬)은 시호이다.

[원문]

我昭敬大王, 以理身之法, 推濟衆之仁, 留心醫學, 軫念民瘼. 嘗於丙申年間, 召太醫臣許浚敎曰, “近見中朝方書, 皆是抄集, 庸𤨏不足觀 爾宜裒聚諸方, 輯成一書. 且人之疾病, 皆生於不善調攝, 修養爲先, 藥石次之. 諸方浩繁, 務擇其要. 窮村僻巷, 無醫藥而夭折者多, 我國鄕藥, 多産而人不能知. 爾宜分類並書鄕名, 使民易知.” 浚退與儒醫鄭碏, 太醫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等, 設局撰集, 略成肯綮.

-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월사집(月沙集)』 권39 「동의보감 서문[東醫寶鑑序]」

[해설]

윗글은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이정귀의 문장으로 『월사집』과 『동의보감』에 나란히 실려 있다. 서문의 내용은 다 같은데, 『월사집』에서는 선조 임금에게 ‘소경대왕’이라는 시호를 썼고, 『동의보감』에서는 ‘선종대왕’이라는 묘호를 쓴 게 다르다.

『동의보감』은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태어났다. 임란으로 많은 백성들이 질병과 전염병으로 숨을 거두자 선조는 백성들을 병마에서 구제할 뜻을 품었던 것 같다. 스스로 의약서를 모으고 읽으면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약서 편찬을 구상하였다. 전란 중이었지만, 선조가 모은 중국과 조선의 의약서는 100여 권에 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조는 내의원의 태의 허준을 불러 자신의 뜻을 전했다. 선조는 자신이 검토한 중국의 의서들이 자질구레하여 볼만한 게 없다며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라고 명령한다. 선조의 중국 의약서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그러면서 선조는 질병을 다스리는 데는 의약으로 치료하기에 앞서 심신 수양으로 예방해야 한다는 자신의 건강 철학을 천명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하교한 내용은 중국을 능가하는, 그리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를 편찬하라는 ‘조선 의학 선언’ 이었다.

선조의 조선 의학서 편찬 취지는 ‘토산 약품의 이름까지 함께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150년 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시한 뒤 ‘사람마다 쉽게 배워 일상생활에 편하게 사용하라.[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고 쓴 ‘어제 서문’의 애민의식과 뜻이 상통한다. 

이정귀의 서문에서 알 수 있는 또 다른 점은 『동의보감』이 내의원의 국가사업으로 시작한 관찬서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작(鄭碏)은 도교의 사상을 『동의보감』에 접목시킨 학자였고, 태의 양예수는 초기에 편찬 작업을 지휘했다. 책의 틀이 갖추어지자 정작은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양예수와 선조는 전쟁이 끝난 얼마 뒤에 차례로 숨졌다. 이로써 『동의보감』이 완성되었을 때는 허준 혼자 남아 대표 편찬자로 기록되게 되었다. 

지난 9월부터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에서는 ‘고전 읽기’의 일환으로 『동의보감』 강좌를 열고 있다. 전직 교수인 한의사가 진행하는 이 강좌의 수강생은 20여 명으로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고전 강좌와 다른 특징이 있다. 3개월째 접어드는데도 개강 초반의 출석률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시민강좌의 경우 강의가 중반을 넘어가면 출석자가 급감한다. 유독 『동의보감』이 시민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고전으로서의 매력일 것이다. 실학자 이덕무는 『동의보감』을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함께 ‘조선의 좋은 책 3종’으로 꼽으면서, 유학자도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익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조 임금도 조선의 의서로는 『동의보감』을 으뜸으로 꼽았다. 정조는 또 이 책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는 『수민묘전(壽民妙詮)』을 발간해 보급하였다. 그즈음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읽혔다.

연행 사절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간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우리나라 서적으로 중국에서 간행된 것은 극히 드문데, 『동의보감』만이 널리 유행하였고 판본도 매우 정묘하였다.[我東書籍之入梓於中國者甚罕 獨東醫寶鑑盛行 板本精妙]”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동의보감』은 동아시아의 스테디셀러였다.

오늘날에도 『동의보감』은 전통의학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유네스코가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고, 최근 문화재청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시킨 것은 의학 고전으로서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심신 수양서와 생활 의약서로서의 가치이다. 『동의보감』은 400년 전에 출간된 ‘오래된 책’이지만, 오늘에 적용해도 좋을 내용이 적지 않다. 그것은 한의학의 속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조지훈 시인의 부친으로 한의학에 이름이 높았던 조헌영은 동양 의술의 특징을 서양 의술과 대비시켜 이렇게 정리하였다. “한의학은 국소 치료가 아닌 종합 치료이고, 인공 치료가 아닌 자연 치료이며, 증세를 다스리는 의술이 아닌 근본을 다스리는 의학이다. 또 병균이나 질병을 막는 방어 의술이 아닌 내적인 생명력을 기르는 양생 의술이다.”(『통속한의학원론』) 이러한 한의학의 원리를 이해하면 자신의 몸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동의보감』 강좌가 호응을 얻는 것은 병을 치료하는 법이 아니라 자기 몸의 원리를 깨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들리는 얘기로는 요즘 한의사들 가운데에서도 『동의보감』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동의보감』보다 중국의 의약서를 높이 평가하고, 임상에서도 양방의 의술을 적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의보감』은 단순히 중국 의약서를 재편집한 게 아니라 한국의 의서로 새로 태어난 책이다. 오늘날에도 살아 있고, 미래에도 계승할 수 있는 전통 의약서이다. 그것을 한갓 전통시대에 풍미했던 과거 유산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동의보감』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공부가 필요할 때이다.


글쓴이 : 조운찬

•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 경향신문 편집국 문화부장과 문화에디터,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

 

 

 


-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허가를 얻어 <거제뉴스광장>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  ‘고전산문’ 코너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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