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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패놀음 걸사행(乞士行)
사당패놀음 걸사행(乞士行)
  • 고영화 시민기자
  • 승인 2015.12.13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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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의 고전문화산책 17]

낙하생 이학규(李學逵)은 19세기 초반, 당시 경남 지방의 민중생활상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였고 다양한 사상(事象)을 간과하지 않고 과감히 시작(詩作)의 소재로 받아들였다.

그의 현실주의 문학노선은 그 범위를 스스로 창조적으로 확장, 발전시켜 나아간 결과인 것이다. 또한 그의 문예 취향적인 기질이 그것과 합쳐짐으로써 창작면에서 바라보는 현실과 삶, 풍속의 다양성에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24년간 유배기간 중에 20년은 김해에서, 4년은 거제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가 직접 민중과 함께 생활하며 느낀 민풍을 가감없이 작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다음은 걸사(乞士) 즉, '떠돌이 중(사당패)'들의 구걸행각을 묘사한 걸사행(乞士行)이라는 <장단구 고체시>작품이다.

조선 정조(正祖) 때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어원(語源) 연구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를 읽은 낙하생은, 경남 유배지에서 걸사들이 소고를 들고 노는 모습에서 동작 하나하나가 눈앞에 보듯이 살아 움직이고 있듯이, 모두 6장으로 하여 구걸행각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아래 셋째 장에서는 그들이 하층민으로서 당시의 윤리규범의 구속에서조차 벗어나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계층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를 깍지 않고, 중 행세를 하는 이들 걸사들에게는 또 아내가 있어 거느리고 다녔는데 곧 그들을 사당(社堂,寺黨)이라 불렀다 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작가가 비속한 표현을 주저없이 수용하여 한시화한 것이 두드러진다. 사대부의 정통 한시에서 중시하는 전아한 품격보다는 민중들의 생동하는 모습과 그들의 정서를 실감 있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진취적인 문학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 지은 후반부 4장과 5장에서는 정경묘사가 아닌 걸사들이 직접 부른 ’타령‘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한역되어 있어 흥미롭다.

걸사(乞士)는 원래 불교에서 비구(比丘)의 세 가지 뜻 가운데 하나로써, ‘참다운 수행자‘이다. 비구는 모든 생업을 끊고, 밥을 빌어서 몸을 기르고, 또 법을 빌어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르므로 걸사라 했다. 또는 출가하여 불법을 닦고 실천하며 포교하는 사람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봉건시대에는 출가한 남자를 걸사(乞士), 출가한 여자는 걸녀(乞女)라 불렀는데, <걸(乞)>이라는 것은 <빌어 얻는다>는 말이다. 무엇을 빌어 얻는가 하면, <법을 부처님께 빌고, 음식을 사람에게 빈다.>는 것이다.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얻는 것이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치심을 공손히 받는 것이다. 남에게 <밥>을 비는 것도 공손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남녀 사당패들이 이를 도용해, 떼를 지어 도회지나 시장터에서 노래와 춤으로 사람을 모으고 재주를 보이며 돈을 벌기도 했다. 여사당은 매음도 했는데 늘 떠돌이 생활이었으며 그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은 사찰이지만, 사찰이 없는 곳에도 거처했는데 이곳을 ‘불당(佛堂)‘ ’불당골‘이라 불렀다.

거제도에도 여러 곳에 ‘불당(佛堂)‘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정조 20년 1796년에 사간 최중규(崔重圭)가 임금께 아뢰기를, “근래 우파(優婆 사당패)의 유희는 그 폐단이 많은데 시속에 이른바, 남자는 거사(居士), 여자는 사당(師黨)으로 불리는 자들은, 승인(僧人)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고 도적인 셈입니다. 이들은 시장에서 유희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유혹하며 마을에 섞여 살며 폐륜아들을 미혹하는 것이 팔도가 동일하지만 삼남이 더욱 심합니다”라고 그 폐단을 고하고 있다.

이들 걸사패(사당패)들은 비록 머리털은 깍지 않았지만 중의 행세를 하며 불당(佛堂)을 거처로 이용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곳저곳에서 구걸하는 모습은 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각설이패들이 각설이 타령을 늘어놓고서 구걸한 대신, 이들은 소고(小鼓)춤 놀이를 보여주고서 곡식이나 돈을 받으면서, 시주(施主)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각설이패들의 ‘각설이 타령’이나 장타령꾼의 ‘장타령’ 대신 아래와 같은 ‘걸사타령’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하층민이라는 데에서 대동소이하나, 그래도 그 출신성분이 조금은 다른 까닭으로, 타령의 내용에서 전자에 비하여 문자나 고사의 사용이 제법 격식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학규의 ‘걸사행(乞士行)’ 시는 걸사패들이라는 천민집단에서 불리어지는 우리말 노래를 한시화한 것으로써, 조선후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민요의 한시화’라는 문학사적 조류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일정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걸사행[乞士行]

鼕鐺鼕鐺鼕鐺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一串小皷繩鞔張 한 손잡이 작은 북 끈 늘어지고
長柄刓脫作膩光 긴 자루 달아서 번들거리며
連環鑞鐵磨鎗鎗 둘러친 쇠조각 부딪쳐 소리나네.
一槌俯首長 한 번 치고 머리 굽히고
再槌輪電光 두 번 치고 번개처럼 돌리며
三搥背後藏 세 번 치며 등 뒤로 감추고
四槌當褌襠 네 번 치고 무릎에 내리며
一擲空中翻覆忙 한 번 공중에 던져 뱅그르 돌린다.

鼕鏜鼕鐺鼕鐺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歌口鼓手相應當 노래 가락과 북치는 소리가 서로 어울리니
霝巖嫰竹細平凉 신령한 바위의 고운 대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葛繩帽子踈結匡 칡끈으로 모자를 성기고 비뚤게 묶고
三南逋吏元山商 삼남지방 포리(逋吏)와 원산의 상인은
額瞬齒唾油䯻香 이마로 깜빡이고 침을 튀기는데 윤기 나는 상투 향기로운데
使錢如水乾沒囊 돈을 물 쓰듯 남의 물건을 빼앗아 주머니에 넣는구나. 
東家宿一客房 동쪽 집에서 잠자는 한 손님의 방엔 
西家乞一升粻 서쪽 집에서 구걸한 한 되의 양식 뿐.
店炕墟市風雪霜 시장이 열린 장터에 눈서리가 날리고 
三韓世界無家郞 삼한 세상엔 집도 서방도 없다네.
阿彌陀佛念不忘 아미타불 마음에 새겨 잊지 말자며
逢人卽拜乞士裝 만나는 사람마다 굽신굽신 걸사의 행장이로세.

鼕鐺鼕鐺鼕鐺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湖南退妓海西娼 호남기생 해서창녀
一佛堂何爭我社堂汝社堂 한 불당에서 어찌 내 사당 네 사당 다투느냐
箇處人海人山傍 사람 많은 곁에 처해 있으면
暗地入手探帬裳 몰래 손을 넣어 치마를 더듬는구나. 
汝是一錢首肎之女娘 너는 한 푼에도 허락하는 계집이요
我又八路不閾之閑良 나는 온 세상을 떠도는 한량이지
朝金郞暮朴郞 아침에는 김서방 저녁에는 박서방
逐波而偃隨風狂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멋대로
一般布施茶酒湯 너나 내나 몸 허락도 흔한 일이지

鼕鐺鼕鐺鼕鐺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好時節三月春陽 “호시절 3월 봄볕이로세. 
鏡浦臺寒碧堂 경포대(鏡浦臺) 한벽당(寒碧堂)
洛山寺海金剛 낙산사(洛山寺) 해금강(海金剛)
花開日落風亂颺 꽃피고 해지니 바람 세차게 불고
梧桐秋夜月澄光 오동나무 가을밤에 달빛이 맑고나.
我自思郞心內傷 내 마음속에 생긴 사랑으로 애태우니
淸江上兩鴛鴦 맑은 강의 원앙새 한 쌍이여~
莫願速死亡 부디 오래오래 살지어다.
死生那得如所望 생사(死生)가 소망같이 되리오 마는
靑秊孀白骨郞 청년과부 백골신랑
百秊未死守空牀 백년동안 죽지 못해 빈 침상을 지키느냐. 
不如且進千萬觴 차라리 다 놔두고 천만 술잔이나 들이게나.“

鼕鐺鼕鐺鼕鐺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施主宅前乞米糧 시주하는 집 앞에서 양식을 구걸하는데
一角中門長行廊 일각중문(一角中門) 장행랑(長行廊)에
小首婢子鸚䳇粧 작은 머리 계집종이 앵무새로 화장하고
輭藍帬拖禮安詳 연한 남빛의 치마를 끄는 점잖은 모습이네.
統營盤子三斗粱 통영 소반에 서 말의 곡식과 
當中大錢十文強 가운데 10문 이상의 엽전에
常平通寶字煌煌 상평통보 글자가 반짝인다.

請爲祝壽如山岡 “축수하노니 산만큼 오래 사소서
男施主女施主旣富且康 남시주 여시주들이여~ 부자되고 편안하며
生男生女百子房 아들딸 백 명이나 낳아서
文思蘇內翰詞章 글은 소동파의 문장 같고
書體趙承旨草半行 글씨는 조맹부의 행초서라
謁聖科上巳春塘 알성 문과시에 춘당대에 올라서
狀元唱榜心神彰 장원급제 방 붙으니 심신이 빛나네.
六曹尙書榮寵將 육조 판서에다 임금의 은총받고
八道觀察旂纛揚 팔도의 관찰사로 깃발을 드날리네.
前塲後院萬斯倉 앞마당 뒤뜰에 창고가 즐비하고
廩頭作巢鸛鶴翔 곳간머리 둥지엔 학들이 날아든다.
南園北舍棗栗桑 남쪽 정원 북쪽 집둘레엔 과수와 뽕나무요
鵂鶹一聲百事昌 부엉이 한번 울자 온갖 일이 번창하네.
左翅一拂祿穰穰 왼쪽 날개 한번 치면 녹봉이 풍족하고
右翅一刷壽無疆 오른쪽 날개 한번 갈면 수명이 끝없네.
千秋萬歲無盡藏 천수 만세 무진장 하소서!“

鼕鐺鼕鐺鼕鐺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둥둥 뎅그렝
乞士告退又顧之他方 걸사가 물러나며 돌아보고 고하기를, “다른 지방으로 가노라.“

[걸사(乞士) 俗以乞士誤稱居士 詳見丁籜翁雅言覺非] 속인들이 걸사를 거사로 잘못 일컫는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주1]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 삿갓. 천인계급이나 상제(喪制)가 쓰던 갓. 평량립(平凉笠)·폐양립(蔽陽笠)·차양자(遮陽子)라고도 한다. 가늘게 오린 댓개비로 성기게 얽어 만든 것으로, 모자집과 테의 구분이 분명하며 모정(帽頂)은 둥글다.
[주2] 포리(逋吏) : 예전에, 관청의 물건이나 재산을 사사로이 써 버린 관리를 이르던 말.
[주3] 목어 액순(目語額瞬) : 눈으로 말을 하고 이마로 깜짝거림.
[주4] 건몰(乾沒) : 법에 걸린 물건을 관아에서 몰수함. 남의 돈이나 물건을 빼앗아 가짐.
[주5] 일각중문(一角中門) 장행랑(長行廊) : 길거리 양쪽에 기둥이 2개씩 세워놓은 상점이 이어진 거리.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있는 중문(中門)과 길거리에 벌여 세운 어용(御用)의 상점.

◯ 걸사[乞士] / 정약용(丁若鏞) ‘아언각비(雅言覺非)‘ 中.

걸사(乞士)란? 머리 깍은 승려가 아니다. 우리말로 거사(居士)라고도 부르지만 잘못된 것이다. 명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완위여편(宛委餘編)》에 기록된 불가서(佛家書)를 번역해 말하면, 비구(比丘)가 걸사(乞士)이다.

위로는 부처님을 따라 빌어서(乞法) 마음을 닦고, 아래로는 마을에 나가서는 밥을 빌어서(乞食) 몸을 유지한다는 뜻이 있다. {걸사의 처를 ‘우바니(優婆尼)‘이라 하고, 방언(方言)으론 사당(舍堂)이라 부른다.} 예기(禮記) 옥조(玉藻)편에서 보면, “거사는 비단 띠를 한다.[居士錦帶]”고 쓰여 있다. {후한 때 정현(鄭玄)은 “거사는 학문과 기예가 뛰어난 처사이다.[道藝處士也]”라고 주해(註解)하였다.} 위(魏)나라 서예가 호소(胡昭)는 ’호거사’{위지전}, 남조(南朝) 양(梁)나라 도흡(到洽)은 ‘도거사’{남사}, 진(陳)나라 우기(虞寄)는 ‘동산거사’{남사}, 당나라 백거이는 ‘향산거사‘, 구양수는 ’육일거사‘였다. 거사(居士)를 어찌하여 천한무리에 칭한다 말인가? 우리 소리로는 입성으로 말하는데 중국 음에는 종성이 아니다. ’居’와 ‘乞’이 서로 섞여 쓰인데 따른 것이다.

[乞士者 不剃之僧也 東語謂之居士 誤矣 王世貞宛委餘編 錄佛書譯言 比丘者乞士也 上乞法 下乞食也 (乞士之妻曰優婆尼 方言謂之舍堂) 禮記曰居士錦帶 (注云道藝處士也) 胡昭稱胡居士 (見魏志) 到洽稱到居士 (見南史) 虞寄稱東山居士 (見南史) 白居易稱香山居士 歐陽修稱六一居士 居士豈賤流之稱 我音入聲 華音無終聲 居乞得相混也]

[주1] 위지(魏志) :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 시대의 사서(史書) 《삼국지(三國志)》 65권 중에서 위(魏)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30권.
[주2] 남사(南史) : 중국 당나라의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남조(南朝)의 남송(南宋), 제(齊), 양(梁), 진(陳) 네 나라의 역사책.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 권10 형전(形典) 제5조(第五條)에, “지금의 걸사(乞士)와 우바(優婆)는 두루 유랑하며 매음하니 당장 이 율(律)에 적용해야한다. 우바는 소고를 치며 범어(梵語)로 노래한다. 이로써 백성에게 재물을 구걸한다. 마땅히 엄금해야한다.”[今之乞士優婆 周流賣姦者 當用此律 / 優婆擊小鼓唱梵語 以乞民財者 亦當嚴禁].

다산 정약용은 실증적인 사회현실에 대한 개혁을 강조하면서 걸사(乞士)를 엄격하게 논죄하였으나, 낙하생 이학규는 천민 중에도 최하층의 천민의 삶까지도 너그럽게 포용하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문학에다 창작하여 재현하고 있다. 다산에 비해 문예 취향적이었고 민중의 세속적인 삶 자체를 사랑한 낙하생의 기질이 잘 드러나고 있다.

19세기 초반, 전라도 강진의 정약용(유배18년)과 경상도 김해∙거제의 이학규(유배24년)는 각각 지역에서 역사문화풍속과 백성들의 현실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등 정치제도와 사상 학문에 중점을 두었고, 반면 이학규는 역사문화와 풍속, 문학에 더 뛰어난 소질을 보이니, 이로부터 실학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 문학세계를 창출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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