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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조선소 희망 버스'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기고]'조선소 희망 버스'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 거제뉴스광장
  • 승인 2016.10.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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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김춘택(거통고 조선소 하청노동자 살리기 대책위원회)

지난 5월 11일 새벽, 서른여덟 살 삼성중공업 하청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린이날 연휴, 대통령이 정한 임시 공휴일에 모처럼 가족들과 3박 4일 캠핑을 다녀온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회사는 월요일 출근한 노동자에게 부당한 조치를 했고 그는 결국 고민 끝에 사직서를 썼습니다. 하지만 "개 같이 일하다 개 같이 버려졌다"는 모멸감은 끝내 견딜 수 없었고, 다음 날 새벽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아홉 살 아들과, 일곱 살·다섯 살 딸을 둔 세 아이의 아빠였습니다. 일곱 살, 다섯 살 동생은 아직 죽음이 뭔지 몰라서 장례식장에서도 회사 앞에 차려둔 빈소에서도 웃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나 아홉 살 오빠는 거리에 놓인 아버지의 영정을 혼자서 물끄러미 오래 바라보곤 했습니다.

2주만에 비로소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아홉 살 아이는 검은 양복을 입고 상주가 되어 조문객들을 맞았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조문객과 맞절을 하고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나중에 살아가면서 아이에게 이 시간이 어떻게 기억될까 궁금했습니다.


캠핑 다녀와서 목숨 끊은 세 아이의 아빠

두 달 뒤인 7월 11일 아침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가 작업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 됐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달 전 이른바 '블랙리스트' 문제로 상담했던 노동자였습니다. 다니던 회사가 폐업했는데, 밀린 임금을 다 달라고 했다고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삼성중공업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 일을 하기로 했는데, 출근 당일 알 수 없는 이유로 출입증 발급이 불허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밀린 임금 달라고 '단체 행동'을 했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다시 대우조선해양 하청 업체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원청은 하청 업체 사장에게 그를 고용했다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결국 다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늦은 밤, 장례식장에서 여전히 취업을 못한 그의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답답함과 동료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술에 취해 쏟아냈습니다.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30대 중반의 노동자, 할 줄 아는 일은 오직 조선소에서 배운 기술밖에 없는데 '블랙리스트'라는 황당한 이유로 취업의 길이 막혀버린 노동자,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어찌할 수 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젊은 노동자의 원망과 하소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30대의 죽음

지난 4월에는 경남 고성에 있는 STX고성조선해양 하청 노동자 20여 명이 원청에 체불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회사 앞에서 20여 일 동안 농성을 했습니다.

STX고성조선해양은 하청 업체에 일을 시켜놓고 일이 거의 끝날 때쯤인 3~4개월 뒤에야 비로소 도급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그동안 하청 업체가 고용해 투입한 인원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공사 대금을 대폭 삭감하는 형태로 하청 업체와 하청 노동자들을 착취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하청 업체는 폐업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물량팀장과 물량팀 노동자가 함께 투쟁에 나선 것입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분노를 쏟아내며 힘차게 싸웠습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은 정보과 형사의 사진 채증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시종일관 신나고 즐겁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원청으로부터 공사 대금을 추가로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 8월에는 삼성중공업 하청 노동자 100여 명이 하청 업체 폐업으로 인한 체불 임금 27억 원 해결을 요구하며 회사 정문 앞에서 23일 동안 농성 투쟁을 했습니다. 27억 원의 체불 임금에 대해 폐업한 하청 업체 사장도 원청도 나 몰라라 하고 오직 국가가 지급하는 체당금만 받고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비상대책위를 만들어 한 달을 뛰어다녔지만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청 노동자들은 농성 투쟁에 나섰고 23일 동안 아침, 저녁 출퇴근 투쟁을 힘차게 진행했습니다. 삼성그룹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이재용 부회장 집 앞에서 3박 4일 노숙 투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의 체불 임금 투쟁은 추석을 앞두고 정치권과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고 결국 27억의 체불 임금을 모두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싸워서 원청에게 밀린 임금을 받아내다

조선소가 어려움에 빠지면서 땀 흘려 열심히 일해 온 노동자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약자인 하청 노동자, 하청의 하청 물량팀 노동자에게 고통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자본이 밀어붙이는 사람 자르는 구조 조정으로 이미 1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내년까지 더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청 업체가 폐업하고 임금이 체불되고 임금이 삭감되고…. 이런 고통 속에서 어떤 노동자들은 안타깝게 죽음을 선택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두 명의 죽음 말고도 이른바 '신병 비관'이라고 해서 묻혀버린 더 많은 죽음들이 있습니다.

한편, 또 어떤 노동자들은 투쟁을 선택합니다.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를 내고 그 과정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봅니다. 그런데 죽음을 선택하는 노동자나 투쟁을 선택하는 노동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서로 다른 선택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합니다.

매일같이 열심히 투쟁에 동참한 어느 하청 노동자는 "가만히 있었으면 임금을 받을 수 없는 게 너무 억울해서 방에 틀어박혀 술이나 마시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나와서 큰소리 내서 외칠 수 있으니 그래도 살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신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청 노동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고개 끄덕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종이 한 장 차이인 죽음의 선택을 다른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시작이자 유일한 방법입니다.

죽음과 싸움, 종이 한 장의 차이

10월 29일 토요일 조선업 도시 거제에서 '조선소 하청 노동자 대행진'이 열립니다. 대행진은 하청 노동자들이 모여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인 노동조합도 당장의 현실에서는 저 멀리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 있기에, 하청노동자도 일단 한 번 어쨌든 모여보자고 해서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청 노동자가 모이기 위해서는, 모여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이 부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대다수 하청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블랙리스트'라는 불법 행위 앞에서도 분노하기 보다는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청 노동자 대행진'은 처음부터 '희망 버스'와 함께 준비되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의 SOS 구조 신호에 서울의 61개 시민·사회 단체가 응답했고, 전국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10월 29일 희망 버스를 타고 거제를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하청 노동자가 목소리를 낸다면 우리도 그 목소리를 함께 들어주기 위해서, 하청 노동자가 용기를 내서 모인다면 그 용기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기 위해서 희망 버스에 승차하기로 했습니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 대행진'을 알리기 위해 요즘 매일같이 이른 아침과 저녁 조선소 출입문 앞에 섭니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아침 6시부터 출근을 시작하는 3~4만 명의 노동자 행렬을 보고 있으면 구조 조정으로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게 무엇인지 몸으로 느껴집니다.

고된 하루 노동을 마치고 땀과 기름때 절은 작업복 차림으로 조선소를 나서는 3~4만 명의 노동자과 만나노라면 이들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하루하루의 노동에, 이들이 지금 겪고 있는 부당한 고통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이 더는 체념과 침묵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혹 그 누군가가 삶에서 한 걸음 벗어나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선소 하청 노동자도 당당히 목소리를 내고 서로 손잡고 행동할 수 있도록 희망버스를 타고 와서 용기를 북돋워 주십시오.

10월 29일 토요일, 거제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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